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면
1편에 이어 2편입니다.
1편의 부제로 달았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일관된 정체감, ‘나'라는 자기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늘 나란 사람에 대해 혼란스러웠다. 혼자 있으면 곧잘 우울해하면서 또 어느 날은 활기찼고, 어느 때는 한없이 타인에게 매몰차면서도 또 어느 날은 대가 없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내 안팎으로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는 다양한 생각과 모습으로 인해 항상 불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평온하게 자기 페이스를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어딘가 매사 어지러운 나의 모습이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이야 MBTI로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지만, 과거 '자기소개 타임' 혹은 '프로필 자기소개란'이 나오면 나는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고 객관적으로 날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를 찾기 위해 애썼다. '따듯한 사람이긴 한데, 매번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고 차가운 사람은 더더욱 아닌데..' 이중적인 스스로에 대한 모습에 어울리는 적합한 수식어가 없었다. 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를 그나마 중립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본 친구가 '그건 네가 아니야'라며 부정하면 바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이 설명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 대한 평가를 직간접적으로 듣길 바랐고, 애니어그램부터 성격유형검사, 심리검사 등 나를 정의 내릴 수 있는 어떤 검사든 발견만 했다 하면 빠져 들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한 어떤 사람을 발견이라도 하면 '나도 저렇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나는 나에 대한 완벽한 설명집을 만들기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 혼돈의 카오스에 빠진 내 안팎의 다양한 모습들을 어떻게든 단순한 언어와 표현으로 가둬두고 싶었다.
1 -'나'란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위에 말한 대로 따뜻하기도 했고, 차갑기도 했다.
여기서 문제는 나는 그 모습을 '이중적' 혹은 '가식적'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부적절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 상황에 따라서 태도와 감정이 쉽게 변하는 어린 나와 다르게 성숙하고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더 깊은 욕망은 나도 누군가에게도 그렇게 보여줬으면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널뛰는 감정이나 생각이 내 내면을 어지럽히는 날이나 남에게 감정적으로 행동한 날엔 자기 전까지 '내가 또 왜 그러지'하며 홀로 자책했다.
사실 누구든 나를 차갑게, 따뜻하게, 우울하게, 명랑하게든 어떤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핵심은 타인은 나의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전체성은 오직 나만 안다.
나의 여러 모습들은 나란 입체적인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모습에는 타인은 몰라도 나는 아는 그럴만한 나만의 맥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난 나의 모든 행동과 말, 심지어 감정까지도 누군가의 허락받아야 하는 것처럼, 양면적이고 다양한 나란 사람의 입체적인 모습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 제 멋대로 널뛰는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나라는 모습에 대한 일관성과 정체감에 대한 감각에 주도성을 놓아 버린 것이다.
책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나라는 모습에 일관성을 계속 잃어버리는 상태를 ‘불연속적인 자기 감’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자기 감을 지닌 채 살아가면, 타인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든 어떤 행위의 맥락들이 연결되지 않는 일관성 없는 사람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이 지금 왜 저런 행동을 하고 왜 저런 판단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신뢰하기 어려워지고, 매사 기분에 따라 혹은 타인의 평가에 맞춰 행동이 돌변하는 태도 때문에 누구든 옆에 있으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취약 하나 하며 혼란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마저 덩달아 흔들릴 수 있다고 한다.
중심 잡기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그리하여 수시로 자아상과 타인상이 변하고, 기분과 행동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사람들을 정신의학에서는 경계선 성격장애(Bonderline Peronality Disorder)로 분류한다. 이들은 정체성 혼란을 특징적으로 보이는데, 자기에 대한 지각과 평가, 삶에 대한 목적, 가치 등이 시시때때로 변하고, 타인에 대해서도 과대한 이상화와 과소평가를 오가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인다. (생각보다 굉장히 흔하다고 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친밀한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연인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이상형이라고 칭송하다가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조금만 들어주지 않거나 멀어지는 태도를 보이면, 돌변하여 상대를 비난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하다가 관계가 끝날 것 같으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상대에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깨져서 흩어져버릴 듯한 자기 자신을 붙잡아줄 유일한 동아줄이 상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급변하는 생각과 감정, 충동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안정적이고 구체적인 상을 형성하기 어려워, 타인을 통해 그 '중심'을 잡는 것이다.
2 - 일관된 정체감을 기르는 '나만의 언어와 태도'
일관된 자기 정체감을 가진 사람,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중심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나답다'라는 일관된 자기 표상을 어떻게 가져갈지 외부가 아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남이 아닌 내가 맞다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 가치를 기준으로 자기 표상을 찾는다. 나아가 말과 행동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그 모습을 매 순간 자신의 인생에서 추구해 나간다. 그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급변하는 자신의 모습들 또한 나란 서사 안에 계속 연결시켜 주면서, 함께 내 안에 담아낸다.
이렇게 일관된 자기 정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결'과 '화합'이 핵심이다. 정확히는 매일 펼쳐지는 불연속적인 상황과 모습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혹은 타인을 향해 일관된 정체감을 유지하려는 ‘연결의 언어와 화합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자기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란 자기 표상을 하나 세웠다면,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 앞에서 '나는 감정 기복이 좀 큰 편이긴 해. 조심하려고 해도 이렇게 불쑥 화가 나거나 차가워질 때가 있네' 하며 스스로를 인정하고, 타인에게도 '나의 감정기복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줘.' 솔직하게 말한다. 따뜻한 사람도 화가 날 수 있고, 감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오히려 감정을 누르지 말고 따뜻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자신만의 일관된 나라는 정체감을 기르는 의식적인 과정과 행동을 통해 나의 안정적인 정체감과 대인 관계 안에서의 신뢰감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자기 정체감에 대한 주인이 되면, 스스로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기 표상을 수정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누구의 허락이나 책임 전가 없이 나 스스로가 자기 정체감에 대한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중심, 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정체감을 길러가며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나를 안다는 의미의 다섯 번째 해석이다.
이 파트에서는, 앞선 1화에서 미처 다 설명하지 못했던 '나의 한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보려고 한다.
설명에 앞서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을 소개한다.
심리학 연구로 밝혀진 사실들은 인간에 대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성과 개인차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략) 현대인은 인간의 동질성에 대해 비현실적인 환상을 가지기 쉽습니다. (중략) 심리적 고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다면, 누구나 똑같이 행복을 누리는 평등한 사회가 도래할 거라는 환상이 생겨납니다.
나와 타인은 다른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행복해하고, 어떤 사람은 더 쉽게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각자에게 맞는 변화의 가능성 모색할 수 있습니다.
1 - 나만의 고유성은 나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인지하는 '진실한 태도'에서 나온다.
나를 안다는 것은 심리학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오은영 박사님의 책 중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란 책이 있다.
그 책에서는 여러 상담사례를 다루는데, 그 상담사례마다 첫 도입에서 아이를 '아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례에서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 또 어떤 사례에서는 '지나치게 민감한 아이', 또 어떤 사례에서는 '불안지수가 높은 아이' 등 상담사례마다 각각의 아이들이 가진 고유의 성향을 먼저 짚고 넘어간다.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우리도 각자마다 고유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단지 고유의 성향이 성장 과정 안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성인이 되며 다듬어질 뿐이다.
나만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하면, 집에서든 바깥에서도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 습관적으로 남과 다른 '나의 고유성'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개선하려고 하고, '자연스러운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현재에 실재하지도 않는 영화, 드라마에서 나오는 환상적 존재를 해소하려고 하고, '나만의 길'을 가는 대신 통제할 수 없는 생각에만 사로 잡혀 현재가 아닌 과거 혹은 미래에 자신을 붙잡아둔다. 인생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고, 내가 아닌 모습으로, 남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더 그럴싸하고 멋진 모습을 가장하며 사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느낌, 어떤 불안과 공허함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반대로 나란 사람의 전체의 모습, 즉 나의 장점과 단점을 공평하게 고려하고 '내가 타고난 나의 본연의 모습'을 긍정할 수 있게 되면 충만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 혹은 과대 평가하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집중하던 삶에서, '내가 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나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즉, 에너지의 방향을 다시 세우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불필요하게 어지러운 내면을 억압하고 통제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되고, 나란 존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부피와 무게만큼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삶이 더 이상 벅차지 않다. 삶이 가볍고 단순해진다.
2 - 자기 수용의 확장, 타인을 수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와 너그러움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 특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타인의 다양한 모습을 수용하는 일도 쉬워진다.
특히나 애착 손상을 경험한 혼란형 애착 유형에게 있어서 '자기 수용'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애착 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혼자서 자기 정서를 조절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반영해 주고 담아내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이때 자신을 반영해 주는 안정적인 대상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있는 그대로 수용받아보고, 타인의 다양한 모습도 반대로 수용해 보면서 자신이 혹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통합적인 감각을 키운다. 나아가 삶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자연스럽고, 또한 그것이 관계 속에서 달래질 수 있음을 학습한다. 이는 감정과 기억의 저장소인 변연계에 각인되어,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환경적 지원에 대한 감각을 남긴다. 세상과의 연결되어 있음을 체감하면, 때로 고독할지언정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는다.
스스로가 잘나고 완벽해서가 아니라, 조금 못나고 부족해도 괜찮다는 것을 경험하고 정말로 그것을 느껴본 사람은 그렇게 세상과 자신, 타인에 대한 통합적인 감각과 자기 고유성을 인식하기 더 쉬운 것이다.
반면에 애착 손상을 겪은 성인에게 ‘수용’은 모든 것을 감싸고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스스로를 참아내기도 벅찬데 상대방까지 참아야 한다니. 특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서로 있는 그대로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연인 관계 안에서 '수용'이 잘못 해석되기 쉽다. 수용을 마치 '무지성으로 상대의 단점까지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일, 인내하고 희생하는 일'이라 오해한다.
'수용'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용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나란 사람, 완벽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나의 고유성, 나의 한계'를 수용하듯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인간으로서 완벽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상대를 바라봐주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서 수용을 자칫 수동적으로 상대방 혹은 관계를 흘러가는 대로만 지켜보라는 의미로 또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수용'은 위에서 날 수용함으로써 더 여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조정하듯 '둘의 만남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으로 에너지를 조정하고 더욱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것도 못해줘?' 하며 비난하고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너를 비난하고 싶진 않아. 갈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이 있을까?'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있는 그대로 상대를 수용하는 사랑인 것이다. 또는 '이 것만 고치면 완벽한 사람인데, 제발 나를 위해 이것만 좀 바꿔줄 수는 없겠니?' 하는 마음이 들 때, ‘이 것'만 뺀 그 사람은 애당초에 존재할 수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아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미한 일에 더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건강한 방향으로 조정해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랑인 것이다. 다정함이 장점인 상대가 타인들에게도 다정해 내게 쏟을 에너지가 부족한 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그 사람의 고유한 속성이듯 상대가 변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에너지의 방향을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것이 바로 '수용'이다.
물론 상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수용이란 인간적인 개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잊어버려선 안된다. 수용은 한 인간으로서 내가 견딜 수 있는 것과 그 감당의 정도를 스스로 선택하고, 견뎌 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기꺼이 한 인간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통을 무의미하게 감내하고, 무작정 참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이 세월, 과거, 관계와 매일 이별을 겪듯이 수용도 이별이란 결말을 배제하지 않는다.
관계를 끝내든 지속하든, 어떤 방향으로는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일까? 견뎌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선택하고, 충분히 고려했다면 옳고 그른지 지나치게 고민하지 말았으면 한다. 인생도, 사랑도 정답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은 자신이 지닌 영향력, 그것에 대한 온전한 선택과 책임을 지는 존재다. 어떠한 선택도 내가 짊어지는 선택과 책임일 뿐이다. 그것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설령 불온전한 선택이더라도 괜찮다. 당신은 불온전한 인간이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다. 수용은 그런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하는 자기 이해의 욕구에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라고 한다.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이 글을 쓰는 것이고 당신도 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랑은 참 재미있는 게, 사랑에 관한 대부분의 의문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봐야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라는 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상대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되면, 사랑은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참 좋았다. 이제야 조금 나를 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삶이 참 가볍고 산뜻해졌다. 나의 삶을, 나를, 타인을 사랑하는데 힘이 든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참고 자료>
- 임아영 작가의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 오은영 작가의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