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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로 Sep 23. 2024

'나'를 잘 알아야 사랑도 잘한다 (1/2)

나를 알고 있다는 '자기감'에 대해서

앞선 글을 통해서 혼란형 애착유형이 자주 겪는 사랑을 가로막는 '자동적 사고 패턴'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오늘의 글을 통해서는 '나'를 잘 안다는 자기감이 무엇이고,

왜 그것이 건강한 사랑을 시작하고 유지하는데 있어 중요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자기를 잘 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앞선 3화 <나를 있는 그대로 어떻게 사랑하나요?> 에서 언급한 '자기 사랑의 실천'의

가장 첫 번째 단계로 1단계. 자기 인식 & 자기 인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불완전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통합적인 감각'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했다.


오늘의 글은 앞선 3화에서 언급한 그 첫 번째 단계를 보다 현실에 적용하기 쉽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사랑에 관한 모든 서적과 강연에서 늘 가장 중요하다 지적하지만, 결코 누구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던 '나를 제대로 알고 수용한다'는 그 의미와 그것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가지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도 전편 작업에 큰 도움을 준 임아영 작가의 또 다른 추천 도서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명확히 밝히며 시작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1 나의 내면이 '세상을 보는 관점'임을 깨닫고, 세상과의 거리를 둘 줄 아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미치도록 끌리거나 혹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미워하지만 끊어내지 못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를 빗대어 설명하자면, 강렬한 끌림보다도 강렬한 이별에 취약한 편이었다. 상대로부터 갑자기 사랑을 철회당했을 때, 그러한 결단을 내린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지나치게 그 이별에 몰두했고, 그 상대를 우상화하며 이별을 막지 못한 나를 자책했고, 이별을 통한 자책과 실패감을 상대를 향한 미련으로 곧잘 발전시키기도 했다. 사랑 대신 이별에 깊게 빠지는 편이었다.


그 강렬한 감정의 시작에는 어느 정도 그럴듯한 현실적인 이유와 맥락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상대에게서 나는 내 마음 한 구석 오래 눌려 놓고 있던 욕구, 결핍 혹은 울분을 투사했던 것이다.


1 -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투사시켜 '왜곡'하고 '해석'한다면

건강한 애착 관계에서 자라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기회 대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안정한 관계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학습한 채 자라난다. 이에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견딜 수 있고 견딜 수 없는지, 어떤 특성을 신뢰하고 불신하는지, 어떤 때 안정감을 느끼고 위협을 느끼는지에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인지적 채널 - 정서적 채널을 연결해 주는 신체적 혹은 정서적 반응이 왜곡되어, '나쁜/아픈 것 = 가까이해도 되는 것'으로 잘못 대응하며, 자신의 상처와 결핍을 자극하는 대상에 쉽게 이끌리기도 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안 돼요' 말하며 자기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무의식적인 패턴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동적 패턴 혹은 무의식적인 이끌림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특정 상대 혹은 특정 상황에 유발된 감정이나 상황에 쉽게 매몰된다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으로부터 유발된 감정과 정서에 휘둘려, 상황을 마냥 좋은 쪽으로 부풀리기도 의도적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끌리면 그 사람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통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에게 부족하지만 상대는 가지고 있는 어떤 자질에 대해 지나치게 우상화하며 집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잘 안다는 것은, 첫 번째. 자신의 내면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깨닫고, 특정 상황 혹은 상대에 해묵은 감정이 올라올 때면 내 마음에 숨겨 있던 그 감정이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감정을 충분히 애도한 뒤 흘려보내으로써 더는 침투적인 사고에 압도되지 않으며 내 눈앞의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황에 휘둘리는 스스로를 한 걸음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하며, 나아가 자동반사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올라온 감정과 특정한 패턴이 보여주는 내면의 모습을 직시하고 상황을 주체적으로 다시금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  흘러가는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는 대신 받아들이며 세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기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기 반복하는 내면세계에 대해서 하나하나 검열하라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균형과 유연성이다. 침투적 사고든 쓸모없는 잡념이든 소망충족적인 공상이든 간에, 그 모든 생각은 나름의 기능이 있다. 또 내가 의도했건 아니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항시 일어나는 경험이다. 특정 경험을 억누르고 부인할수록 심리적 균형은 무너지고, 오히려 다른 형태로 전환되어 문제가 악화된다.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고 억지로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하려는 시도 역시 한계에 부딪히기 쉽다.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만 남겨두려는 시도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나를 안다는 것'은 강렬히 좋거나 싫은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나 자신에게로 돌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 모양이지?' 대신에 '나는 왜 저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와 같이 질문의 방향을 수정함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식되기 전에 자신의 잃어버린 내면의 조각들을 찾아내보자는 것이다.


특정 사람을 향해 일어나는 감정이 클수록, 외면하고 싶은 욕구가 강할수록, 스스로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일부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한 자기로부터 소외된 파편들은 그 사람을 통해 여기저기로 마구 튀어나오며, 그 모습 안에 나를 비출(투사할)것이다. 그때마다 나의 결핍, 욕심 등 과거의 상흔을 발견할 수도 또는 나의 장점과 맞닿아 있는 열등의식, 단점을 발견해 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계속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라는 인간을 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면 된다. 평범한 인간일 뿐, 나라고 해서 그런 특성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어떤 측면을 숨기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궁극적으로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히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고, 소외되어 있던 자신의 일부를 발견해냄으로써, 흑과 백으로 나누어져 있던 주관적 세계를 수많은 그러네이션이 존재하는 입체적인 세계로 이해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제대로 보고 날 줄 알게 나면, 스스로 취약하다고 여겼던 마음이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또한 자동 반사적인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두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자기 믿음과 확신이  들어찬다. 사랑하고 싶은 상대를 들여다보기 전, 나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3 - 질문의 답을 다른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찾아보기   

나의 경우도 이별 후 상대에 대한 생각으로 매일 밤을 설쳤다. '이제 그만하면 하면 됐다'라고 이제 놓아주자는 생각이 들어도 끝난 사랑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별을 향한 원인을 찾는데 집착했고, 그 상대가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는 장점을 계속 곱씹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랑에 끝에 이별이 있음, 철회될 수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으로부터 '서로를 아프게 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부모님'을 발견했고, 상대의 자유 분방하고 자기 신뢰에 가득한 자신감 있던 모습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갖지 못한 '자유와 자기 믿음'을 발견했다.


에너지의 방향을 나 스스로에게 돌린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로부터 붙잡혀 있는 스스로에게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극되는 해소되지 못했던 '슬픔, 무기력감'의 조각을 찾아 그것을 충분히 애도해 주었다. 그리고 '자유와 자기 믿음'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안정감과 세상과 타인에 더욱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수용력'이란 장점을 지닌 나를  통합적인 시선에서 균형감 있게 바라보며 성장의 가능성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과 나 사이를 중재해 나간 것이다.


결국 나를 안다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뿌연 창을 거두는 작업이다.

흐린 날인줄만 알았던 세상의 풍경, 높은 하늘을 내 두 눈으로 제대로 보는 일이자

흔들리는 창틀에 매섭게 불어오는 줄 알았던 바람이 실은 살랑이는 봄바람이었을 뿐이라는 걸 느끼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2.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경계'와 나란 사람의 '한계'를 인지할 줄 안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로 볼 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맺고 있던 타인 혹은 나와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된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이끌렸던 관계 혹은 미치도록 싫으면서 동시에 미치도록 사랑하는 애증의 관계, 스스로를 취약하다 여기면서도 스스로 무한해질 수 있다고 믿어 왔던 자기 환상을 점검해 보게 된다.  

  

이 글을 시작하며 1편에서 설명한 애착 이론에 대해 상기시켜 보자.


1 - 우리의 사랑도 하나의 성장이다.  

애착 유형이란, 한 개인이 자신과 혹은 타인과 얼마나 친밀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독립할 수 있는지, 얼마나 의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지표다. 또한 평생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현재 관계 맺는 상대 혹은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이제라도 지금까지 내가 자신과 혹은 타인과 너무 가깝지는 않았는지, 지나치게 멀지는 않았는지, 혹은 거리감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파괴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Margaret s. Mable란 심리학자에 따르면, 신생아는 생후 2개월 정도까지 외부 세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상적인 자폐 단계에 있다고 한다. 이후 어렴풋이 외부 세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 유아는 엄마와 자신을 마치 하나의 몸처럼 인식하는 공생기 단계를 거친다.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엄마를 항상 즉각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차츰 유아는 엄마와 구분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며 분리와 개별화의 과정을 밟는다. 


이때, 유아는 자신이 아무리 목놓아 울어도 엄마가 즉각적으로 달려오지 않을 때가 있음을 경험한다. 엄마는 더 이상 내 욕구에만 부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나를 향해 웃어주고,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내게서 떨어지기 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점차 '나'와 '대상'을 구분하기 시작하며 스스로 세상을 탐색하고 조작할 수 있다 는 자율성을 습득하고,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능력을 배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분리-개별화의 과정에서 자기와 타인에 대한 통합적인 표상을 갖추게 된다. 나와 엄마가 별개의 존재라는 인식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자신의 좋은 모습, 그리고 때로는 엄마에게 꾸중 듣는 자신의 나쁜 모습을 모두 자신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정하고 친절한 엄마의 모습과 무심코 실망스러운 엄마의 모습을 통합함으로서, 타인을 전체적인 한 인간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형성한다.


우리의 사랑도 위와 같은 유아의 심리적 탄생 과정을 재현한다. 초반의 꿀 떨어지는 공생 단계를 지나면, 점차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인식이 찾아 온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좋기만 했던 감정들은 나쁜 감정들과 뒤섞이며 내가 알던 사람이 이 사람이 맞나' 싶은 낯선 감정을 만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관계성에는 대상과 공생적인 융합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와 대상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려는 욕구가 공존하며.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신과 상대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통합해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다. 이러한 양가적인 욕구와 감정을 견뎌내는 것. 그리하여 상대를 나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로 존중하면서도, 대상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함께 간직하는 것이 곧 사랑을 지탱하는 역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고 친밀할 줄 아는 균형감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는 '애착 유형'이나, 같이 또는 혼자 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랑'도 다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측면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2 -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대신, '경계 없는' 사랑 대신      

결국 나를 안다는 것은 결국 나의 한계와 타자와의 경계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완전할 수 없는 나의 모습, 인생의 유한성을 간직한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타인이란 함께 또는 같이 가야 하는 대상이자 그 타인도 나와 같은 한계와 유한성을 간직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개인의 분리성에 대한 자각과 굳건한 자기 경계가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는 초월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애정으로 엮인 관계는 일반적인 대인관계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어,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해질 수 있다. 특히 혼란형 애착 유형과 같이 타자와의 건강한 개별성 - 통합성의 균형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불분명한 경계는 더욱 치명적이고 폭발적인 형태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혼란의 대서사시가 펼쳐지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한쪽이 일방적인 희생양으로 보이더라도, 관계 속을 들여다보면 불분명한 경계로 인해 서로서로 갉아먹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사랑은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이 만나, 각자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함께 길을 가게 된 여정의 일부 일뿐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일평생에 걸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이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키는 것 또한 역동적인 흐름의 일부일 뿐, 결승점이 정해진 레이스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별이든 죽음이든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고, 우리는 모두 다르고, 또 모든 사랑은 끝을 맞이한다는 유한성을 인식할 때에 사랑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


나를 안다는 것은

#3 '자기의 힘'을 인지하고, 선택을 행사하고 그 책임을 기꺼이 진다는 것이다.


양질의 애착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

'너에게는 너의 마음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마음이 있으며, 마음이 경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본 신념이 초기에 형성되지 못한 채 자라난다.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표현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수용받아본 경험부터 나의 경험과 감정은 확실히 나의 것이고, 또 부모에게도 별개의 감정과 욕구가 있음을 배우는 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불안정한 애착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파급력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적절한 경계를 지어줄 대상이 부재한 경험을 하며 자라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인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경험하기 어려우며, 자신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잘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 과소 평가함으로써 관계에서 자기 몫을 구분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하지 못할 때, 타인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기보다, 자신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타인은 늘 자기가 예상한 기대 혹은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한다든지, 자기가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주 ‘당신은 잘 모를 거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이야기 다 이해하지?' 등의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기쁨을 줄수도 있다는 것, 상대가 내게 영향을 미치듯 나도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타인이 항상 지금의 모습으로 고착된 게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안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말로 '나 또한 세상에 영향을 미칠 힘이 있으며, 내가 맺는 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안다는 의미다.

  

관계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과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관계의 주도권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거나 자기 패배적인 관계를 반복하게 된다. 또한 타인이 살아 숨 쉬는 사람임을 실감하지 못하면 타인이 어떤 고정된 모습으로 남길 기대하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기 몫을 책임 지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상대에게 무의식적으로 전가한다.


건강한 애착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잘 분화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건강한 관계를 편안하게 느끼고, 그에 걸맞은 대상을 찾아낸다. 또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잘 유지하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불안정한 관계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리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힘과 관계의 영향력을 상대에게 쥐어주고 만다. 그럴 땐 숨을 깊이 몰아 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함께하면 즐겁고, 믿음이 가고, 같이 있으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느껴지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 힘든 문제들도 같이 헤쳐나갈 수 있겠다 싶고, 상대의 저 정도 단점은 내가 감당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이 아닌 그 질문의 답을 내리고 상대가 적합한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체적으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자신과 상대에 관해 끊임없이 알아갈 책임과, 관계의 유지와 종결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안에서 중심을 찾는 과정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상대의 반응에 관심을 쏟기보다 관계 내에서 자신의 몫이 무엇이고, 어떻게 내 몫을 다 할 것인지를 우선순위를 둘 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면 자신의 선의는 늘 짓밟힐 것이고, 언제나 상처받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나를 알고 나의 몫, 나의 책임을 나 스스로가 온전히 짊어지기로 마음먹고 나면 어떠한 갈등과 이별 앞에서도 무조건적인 상대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기 이전에 각자의 몫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참고 자료>

- 임아영 작가의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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