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하려고 해도 왜 나는 '다시' 우울해지고 불안해질까
회사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다 어떤 선배를 험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결핍'이 있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아주 잠깐 놀랐던 것 같다. 그 단어가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 어떤 세대보다도 애착 유형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람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데 있어 애착 유형은 편리한 도구 혹은 관점으로 퍼져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했을 당시에 나도 내게 낙인찍힌 '혼란형 애착 유형'이란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고,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했다.
그 문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몇 개월 간 나를 객관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애착유형을 통해 스스로 인식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
과거의 연애, 방황 등을 반추하며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닫고 나니,
혼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돈됐고, 아는 것을 실현해 보자 생각하니 머리에 쌓이는 고민이 없었다.
즉 꽤 긴 분량으로 총 4편까지 글을 써 내려가고 나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나누고 싶은 고민이 일시적으로 사리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 삶으로 돌아갔다.
나를 한 발자국 멀리 볼 수 있게 되고 나니 한결 일상이 편안했다. 그리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더 이상 '안다'는 인식의 차원에서 변화가 아니라 행동의 차원의 이야기로 발전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말로가 아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또 불안해졌고 우울해졌다.
일상과 마음은 분명 전과 다르게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제자리인 기분이 들었다.
다시 또 무기력해졌고, 관성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패턴 앞에 무너져 내렸다.
머리는 알면서도 과거의 기억과 미래를 향한 불안함에 잠을 설쳤고,
사랑하는 취미와 생활을 이어나가다가도 동기부여를 잃어가며 무기력해졌으며,
가까이하지 말기로 했던, 하지 말기로 했던 나쁜 사람, 행동, 충동을 반복했다.
어떻게 사랑하면 될지 알아도, 그 어떻게까지 몸이 따라 움직여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고 매일 일상을 주변이들과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나를 상상했지만,
고작 3개월 이상 지속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보며 기분은 더 최악으로 곤두박칠쳤다.
되돌아가지 말자고 했던 이전의 나로 돌아가려는 관성,
그 패턴은 분명 끊을 수 없는 습관적인 생각과 그 생각에 대한 중독에 원인이 있었다.
1편부터 4편까지는 '사랑, 관계, 자기 인식'에 대한 건강한 기준을 세우는 법을 배우며, 더 이상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자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식과 행동 사이 간극, 그 현실적인 괴리감이 나를 괴롭혔다.
제대로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그로 인한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했다.
엄습한 무력감 이후로 난 내 머릿속에서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데 나를 가로막고 있는 '습관적인 우울과 불안'에 빠뜨리는 생각의 패턴에 대해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생각의 패턴은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써 내려감에 앞서 이 글은 그 습관적 사고 패턴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 임아영 작가의 책을 바탕으로 쓰였음을 명확히 밝히며 시작한다.
#1 자기 개념과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 : 나를 안다는 게, 결국 나를 정의 내리는 거 아니야?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힌 단 하나의 문장을 꼽자면,
'자기를 잘 알아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날 잘 알아야 한다니.
나는 당시 자기를 알아간다는 의미를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잘 정돈된 테니스 코트처럼 경계선을 그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경계를 그리는 일에 집중했고, 혼자 내 안의 심판관이 되어 그 경계선에 벗어날 때마다 호루라기를 부르며 '그건 내가 아니야!' 외치며 스스로를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 가져다준 부적절함을 느끼며 괴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매번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분명 나는 내가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면서 동시에 우울한 사람이다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 추구하는 이상향을 나란 경계와 기준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사랑스러운 나의 모습을 더 강화하고 싶었고, 그게 내 정체성으로 자리 잡히길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모습은 경계선 안과 밖으로 나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스토리로 인식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럴듯한 일관성 있는 스토리를 구상하고, 그 스토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개념이 좋든 싫든 간에 그 개념을 유지하려고 확장하는 방향으로 자기를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고정된 자기 개념을 그려 놓고 진실이라고 단정하려고 하고, 그 스토리에 맞는 나의 성향을 취사선택하며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 스토리의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나 스스로를 마치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를 가진 어떤 캐릭터로 파악하길 원했던 것 같다. 나의 모습을 마치 잘 짜인 드라마 속 선한 캐릭터, 악한 캐릭터 등으로 하나의 캐릭터처럼 스스로의 정의가 명확해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과 경계를 그어놓고, '내가 바라는 나'란 경계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불편함을 넘어 부적절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 내가 되어야만 하는 모습만을 옳다고 그것만이 진리라 판단해 버리며 나는 현실에서의 나, 여러 불확실한 변수와 모순이 가득 찬 인생의 다채로움을 겪는 현실의 진짜 나의 모습과 생각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책과 자기 실망을 반복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스토리의 어떤 캐릭터로 규정될지, 스스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떼어 놓고 내가 지금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초점을 두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현실의 태도가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 미래는 또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유연하게 인생의 불확실성을 수용하며 그 어떤 것도 옳고 그르지 않다고 스스로와 싸우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작가 또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와 관련된 나의 경험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만히 내 마음속에 있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오롯이 내 선택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통제력과 회피 : 거의 홀로 있으며, 고립감이 평온함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나를 알아간다는 명목 하에 나란 경계를 그으면서 나는 더 현실의 세상과 멀어졌다.
나를 잘 알아야 사랑을 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선명한 경계선을 긋는 일에만 몰입하며
자기 사랑 끝에 만나게 될 내면의 단단한 나만의 성을 상상하며 나는 더욱더 내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존의 친구, 가족과도 친밀하게 교류하지도 않았다.
우습게도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한 소통의 욕구를 영화나 드라마에 의존했고, 진짜 사람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포기하듯 살았다. 또 모순적이게도 여전히 나를 진정으로 알아줄 누군가를 상상하며 기다렸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의미 없는 기다림 앞에 외로움을 느꼈고, 기존의 관계를 돌보지 않아 끊임없는 죄책감과 불편한 찝찝함을 느꼈다.
그렇게 점차 나는 나를 사랑하는 과정인 줄 알았던 시간들 속에서 점점 더 우울하고 불안해져 갔다. 그토록 되고 싶은 이상적인 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되어야만 했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해도, 결코 닿을 수 없었기에 좌절했고 그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혼자 치열히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작가는 물리적 위협 요소가 지극히 줄어든 오늘날,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위협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외부에서 오는 공격과 내부에서는 오는 공격에 똑같이 반응한다고 한다. 즉 내적인 고민과 불안, 혼란이 가중될수록 뇌는 살아 남기 위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난하게 만들고 자신과 투쟁하게 하며, 타인을 회피하며 고립을 택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위협으로 인해 기인된 반응은 스스로 우울과 불안의 근원인 '끊임없는 반추의 굴레'에 갇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한 자기 고립감의 원인은 '자기 사랑 = 안전, 평온'이라고 취급하며, 나의 삶을 거대한 안전가옥으로 만들려는 '통제감'에서 비롯한 것임을 깨달았다.
-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 나란 사람
- 어떠한 변수도 허락하지 않는 안락한 일상
- 나를 평온하고 가슴 뛰게 하는 일상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 그 밖의 것들은 회피하는 삶
통제감은 어디서부터 기인했을까? 되짚어보면 어린 시절의 불안한 가정환경 때문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불화, 반복되는 아버지의 언어폭력 앞에 어머니는 무력했고 자꾸만 아버지를 용서했다. 나는 어머니가 다가올 불행에 미리 대비하지도 본질적인 원인을 해소하려고 들지도 않은 수동적 모습이 늘 답답했고 화가 났다. 그 당시 나는 늘 '절대 잊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할 거야' 다짐했다. 아버지를 향한 복수심과 어머니처럼 인생의 불행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수동적인 태도를 닮지 않으려는 자기 약속이었다.
책에서는 이러한 통제감이 다가올 불행에 빠르게 대처하는데 유리할진 몰라도 현재 순간의 경험에 온전히 접촉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맞춰 관점을 전환하고 심리적 자원을 재구성하는 '심리적 유연성의 역량'을 기르는 데에 있어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생각해 보면 난 과거의 연인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면 바로 깊은 고민에 빠지곤 했다. 내가 아는 불행의 패턴에 상대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그 불행의 씨앗과 같은 어떠한 징조로 보인다면 다가올 불행을 미리 예견했고, 그 불행의 서사에 우리의 만남을 끼워넣기에 이르렀다. 이별은 어쩌면 늘 당연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혼란형 애착 유형이 자신의 겪어온 불완전한 사랑을 닮은 상대에 끌리고, 이후 그 사랑을 건강하게 다룰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다 상대를 밀어내기를 반복한다.
책에서는 그러한 삶에 태도가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을 닫아 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터져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부정한 것들을 무시해 버리기를 택했으며 그렇게 누군가와 소통되지 못한 정서들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여 나는 나의 내면 안으로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옳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반복될 관계의 패턴을 회피하며 그걸 자기 사랑이라 스스로 여기며 난 점차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포기한 사람, 우울과 불안이 밀려들 때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어드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책에서는 마음이 힘들 때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받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의 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아무도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은 혼자야'라고 주문을 외워대며 굴속으로 파고 들어갔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다른 표현일 뿐, 강박적인 자기 의존의 이면에는 기댈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내 감정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 자체를 과감히 생략하며, 언제나 날것으로 감정을 쏟아낼까 두려워했다. 결국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랑을 그려나가길 포기했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 인생을 틀 안에 가두며 통제하고 있던 것이다.
#3. 이분법적 사고 : 애매한 선택은 거부하고,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옳다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즐거운 현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을 관통하는 인지적 특징 중 하나로 이분법적 사고가 있다고 한다. 이들에겐 생각과 판단의 회색지대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앞선 두 가지 사고 패턴의 근원은 결국 이분법적 사고가 핵심이었다.
#1. 내가 추구하는 자아상 - 내가 추구하면 안 되는 자아상 구분하기
: 잘못된 자기 개념으로 인한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려 했던 점
#2 자기 사랑 = 자기 평온과 다름없다고 믿으며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황 회피하기
: 스스로의 평온과 안정만을 추구하며 고립만을 택하려 했던 점
나는 인생의 미덕이 일관성과 의리라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었다. 사랑도 결국 의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면 배신을 당할지언정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와 이별한 전 연인 중 한 명이 '널 사랑하지만 네가 원하는 사랑을 난 줄 수 없어' 하며 이별을 선택했을 적에도 나는 그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면서 어이없는 핑계를 대는 그의 변명에 분노했을 뿐이었다. 나의 감정은 언제나 흑과 백 둘 중 하나였고, 회색 빛을 띠는 선택은 온전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어떻게 느끼고, 어떤 마음으로 관계를 바라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기로 했으면 아무리 괴로워도 사랑을 이어나가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책에선 이러한 이분법 사고로 인한 절대적 믿음이 나의 희생이 아닌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자신이 통합하기를 거부했던 부정적 경험들을 타인의 몫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반대편에 타인을 놓아둬야만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정당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타인은 늘 악이 되고, 실패자가 되고, 불행한 자가 되어야 자신의 세계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랑에 상처받기도 전에 내가 서있는 자리가 늘 옳은지, 늘 감당할 수 있는지부터 체크했다. 그래야 사랑으로 인한 상처로 조금은 덜 아픈 기분이었고, 내가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것 같았다.
작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어느 한쪽이 당연한 듯이 낫다 하는 당위적 판단으로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어느 쪽을 믿을지, 어느 쪽이 나를 이롭게 할지’를 생각하면서 선택해 보라고 조언한다. 즉, 어느 쪽이 옳은지보다 어느 쪽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현실에 더 가까운지를 묻는 편이 이롭다는 것이다.
사랑과 이별 앞에 사랑을 믿기로 한 절대적 믿음보다도 사랑과 이별 중 내게 도움이 되는 선택을 택하는 게 맞았다. 그건 배신이 아닌 것이다.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가 서로 제로섬이 아니라는 점,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저 세상엔 흑과 백이 서로 공존할 수도 뒤섞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통합성이 있다고 한다. 이때, 통합은 긍정을 부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한쪽이 승리하는 개념도 아닌 통합은 긍정과 부정의 경험들이 온전히 각각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순적인 경험의 양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두 가지 경험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점이다. 즉 감사하면서 분노할 수 있다는 표현처럼 긍정, 부정의 두 가지 마음 다 공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떤 선택을 하든 양쪽을 모두 있는 그대로 보고, 한쪽을 선택함으로써 내가 감당해야 할 다른 쪽의 무게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다.
결국 또다시 현실, 삶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의미 없는 투쟁을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라고.
이 세 가지의 자동적 생각 패턴을 깨닫고, 온몸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풀리듯 심리적 자유를 느꼈다. 머릿속에서 도통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는 사실 흘러가는 물길이었을 뿐이라며 제 갈길을 찾아 스르륵 저 멀리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삶을 조금 더 유연하게, 다채롭게, 처벌이 아닌 관용과 자비로, 몸의 긴장을 풀고 삶이란 바다를 유영하듯이 살아보자는 결론에 다 달았다.
결론이 제법 뻔하고 심심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글은 심리상담학에서 일컫는 ‘인지행동치료’와 맥을 같이한다. 인지행동치료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아 감정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자동적 사고를 알아가며 스스로 겪는 불안, 우울 등 문제를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실을 보다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인지행동치료의 핵심은 ‘내담자의 눈을 통해 비추어진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내담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함께 하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적응적인 삶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 치료는 내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며, 내담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가 없는 치료자의 일방적 노력으로는 성공적인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나 또한 이 글을 철저히 내면의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무기력해지고,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부적절감이 점차 나를 짓누르는 기분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제대로 내가 누군지, 나를 괴롭히는 사고 패턴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썼다. 적극적인 것 이상으로 절박했고, 이 글을 스스로를 치료하듯 써내려 갔다. 제대로 된 사랑을 안다고 해서 내 삶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주고 받는데 있어 한 없이 서툴었다.
그럼에도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현실의 나를 바라보기 위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본질적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꼭 돌파해야하는 과정이 분명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연재하면서 나는 더디지만 사랑을 향해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책에 나온 한 구절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해본다.
너무 많은 생각은 경험을 언어를 통해 생각으로만 처리하고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거나 정서적으로 깊이 접촉하는데 서툴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의 감각적 경험이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생각의 과부하에 제동을 걸고 경험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생각을 파고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과 감정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나를 깨닫게 해 준다. 의미가 먼저가 아니라 존재가 먼저이다. 의미가 있어야만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기에 의미에 대한 질문도 던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전 건강한 숨 고르기에 전념하는 나와 같은 당신을 위해.
사랑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생각에만 몰두하는 당신이 조금은 몸에 긴장이 풀기를 바라며.
서툴지만 스스로를 알아가길 멈추지 않는 당신,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오늘의 글을 바친다.
<참고 자료>
- 임아영 작가의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