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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로 Jul 04. 2024

내게 맞는 연애 상대를 판별하는 법

사랑하고 있으면서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 든다면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가 맞는지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혼란형 애착 유형의 경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스스로 확신이 없어

상대의 문제보다도, ‘또 나 혼자 과도한 생각에 사로잡힌 것인가?’ 고민하며,

상대가 '좋은 상대'가 맞는지 스스로 그 진위 여부를 판단 내리기 더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사랑에 대해, 그리고 좋은 연애 상대를 판별하는 법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책을 바탕으로 쓰였음을 정확히 밝히며 시작한다.


사례 1. 내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람


과거 누군가 '사랑이 무엇인가요?' 물으면,

나는 곧바로 매일 내게 끊임없이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쏟는 '엄마'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너희뿐이야' 하는 엄마가 늘 부담스러웠다.

비단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내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친구, 상대도 결국 불편해졌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쉽게 '간도 쓸개도 빼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 믿는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사랑이라 정의하며, 불타오르는 연애 기간 중에도 '이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이 언제 끝날까?' 불안해하고, 이 사랑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사랑이 다시 타오르도록 노력한다.


이미 조금은 식어버린 사랑을 다시 되살리고자 상대 입맛에 맞는 '올바른 행동'으로 칭찬받으려 하고, '좋지 않은 행동'으로 상대의 불쾌감을 피하려고 한다. 상대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게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식어버린 사랑에 노력하지 않은 상대를 비난하고, 내게 칭찬받을 행동을 하면 상대가 다시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결국 서로 원활하게 관계 발전이 되지 못하면, '상대가 맞지 않아서 Or 맞춰주지 않을 만큼 날 사랑하지 않는다 ‘ 라며 이별을 하고 만다. 결국 온전한 사랑을 위해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기 만을 힘쓴다. 제대로 된 상대만 만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


우선 우리가 '사랑'이라 쉽게 믿고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과연 진짜 사랑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모성애가 보여준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주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모성애는 갓난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보호와 애정뿐 아니라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있다는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게 돕는다.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무력한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을 감싸주는 어머니(모성애)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성장하여, 조금씩 세상을 맞설 준비가 되고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커지면 모성애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행동을 하면 칭찬을 하는 '사고와 행동의 세상의 원리(부성애 속성)'를 찾게 된다. 이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아버지의 불쾌감을 피하려는 욕구에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완전한 성숙한 단계에서 그는 보호하고 명령하는 힘으로서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건강한 모성애는 이러한 아이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앞으로 아이가 홀로 자신이 가진 힘을 믿고 이 고독한 세상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길 응원한다. 불안이 아이에게 쉽게 대물림되듯이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부모는 사랑의 방식을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건강한 모성애는 결국 결국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 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 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데도 이러한 두 양심을 모두 가지고 사랑한다.


어머니 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라고 말하고, 아버지 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오로지 어머니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판단력을 잃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발달을 방해하기 쉽다. 반대로오로지 아버지다운 양심만을 간직한다면, 원리원칙을 기준으로 사랑하는 난폭하고 잔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 자신을 찾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갓난아이를 사랑하는 보호와 애정으로만 뭉쳐진 모성애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 대신 성숙한 성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례 2.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두 번째의 경우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현혹이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에게 쏟는 관심과 애정이 실로 대단하다. 마음속 결핍과 공허를 다루느라 고통스러운 나와 다르게 자기 욕구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 같아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그들은 이른바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는 외현적 & 내현적 부류로 나뉘는데, 이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서술할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일관성 부족'이다. 초반 사랑을 쏟아붓는 시기를 지나 갑자기 자신의 사랑을 모두 철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관성 없는 모습을 냉혹한 본성 혹은 자신의 욕심과 우선순위를 채우기 위함이라는 근본적 이유 대신 상대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다. 상대는 갑자기 철회된 사랑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며, 그로 인해 불안과 혼란, 죄책감, 자존감 하락 등 내적인 고통을 받게 된다.


사랑을 살아있음이라 설명했지만, 바꿔 말하면 사랑은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의 자아'사이의 구분 선이 있다 해도, '사랑'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사랑할 줄 아는 능력으로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믿음이다.어머니가 갓난아이에 대해 갖는, 곧 이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걷고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비슷하다. 내 사랑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연애에 있어서 특히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이 체득한 사랑할 줄 아는 힘을 실현하고 집중한다. 진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더욱 위축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상대에게 건강하게 전염이 되고 동일한 지대를 밟고 단단히 서있다는 자신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게 '사랑' 즉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대신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사랑을 상대에게 실현하고 집중하는 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례 3.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사람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우선 이 명제는 상황에 따라 위험하게 해석될 수 있다.

- 예를 들어, 상대의 어떤 점을 꼭 고쳐줬으면 한다고 가정해 보자.

- 그 문제는 '성향의 차이'로 인한 것일 일수도 있고, 성향을 넘어선 '옳고 그름의 문제'일 수도 있다.

- 전자라면 상호 맞춰가야 하는 문제이고, 후자라면 과감히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판단해야 하는 영역일 수 있다. 즉 이 문장은 '차이 & 옳고 그름'이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를 단순히 '사랑의 능력치'에 대한 문제로 바라보게 만든다.


내게도 이 문장을 곧잘 입에 달고 사는 상대가 있었다. 관계 안에서 이 문장이 위험하게 쓰이면, 가해자의 옳지 못한 행위는 쉽게 차이의 문제로 희석되며, 피해자는 졸지에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하는 못하는 부족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장이 위험하게 쓰이지 않도록 위에서 언급한 '아버지다운 양심'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힘에 아버지다운 양심 - 옳고 그름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 으로 상대의 그름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폭력, 강압, 집착 등은 명확히 그른 행동이다. 자신의 안전과 존중감을 훼손하는 행위라면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닌 성향의 차이 등의 서로 다름의 문제라면,
그때는 있는 그대로 상대를 기꺼이 사랑해야 할까?

나는 여전히 상대가 그 점을 고쳐줬으면 싶고, 바뀌지 않으면 더 이상 만남을 지속할 수 없음에도?


사랑의 반대말은 욕망과 두려움이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가 '욕구는 두려움에서 온다. (Desire comes from fear)'란 문장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은 딱 두 가지로 이분하자면 '사랑' 그리고, 그 반대의 지점에 '욕망(두려움)'이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나는 이 글을 쓰는 시간을 정말 사랑한다.

퇴근 후 혼자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잘 쓰든 못 쓰든 나는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 것은 사랑이다.

반대로 내가 만약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잘 써야 한다는 욕망 때문에 한 편 한 편이 어렵고, 이상한 글을 올릴 바에는 포기하고 싶어 진다.

남들이 반응을 하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이 든다. 내가 글에 소질이 없다는 게 사실이 될까 두렵다.

이때, 동일한 행위를 함에도 글을 쓰는 시간은 곧 내게 욕망이자 두려움이 된다.

 

세상 모든 일이 이렇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대를 정말 사랑하는 것인지, 상대에게 내 욕망을 투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오인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 말이 상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차이를 알고 있으면, 연애를 통해 채우고자 하는 내 욕망과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욕망을 버리고 사랑을 시작하면 더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통해 나누고자 했던 '서로의 생명력을 나누는 일', 그 목적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앞선 사랑이란 살아있는 것이란 의미에서, 사랑을 하면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즉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 -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등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능동적인 활동으로서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나는 사랑을 하면서 함께 웃고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 한다는 말을 관계 안에서도 늘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이건 비단 연인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선생은 학생에게서 배우고, 배우는 관객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해 - 그들이 서로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서로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관계할 때 사람은 상호적으로 치유되고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하라'는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듯,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라.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해라.


사례 4.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


난 곧잘 상대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고민에 빠지곤 했다.

사랑이 도대체 뭘까? 이 사람은 날 사랑하는 걸까?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가?

그런 물음이 드는 사람들을 위해 아주 기본적이지만 쉽게 잊고 마는 사랑의 기본 4가지 요소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보호(관심), 책임, 존중, 지식을 동반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랑은 수동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다. 반대로 상대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돌이켜볼 때도 동일하게 서로의 성장과 행복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네 가지 요소 역시 성장과 행복에 목적을 두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보호(관심)이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보호와 관심은 모든 사랑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요소다.


두 번째, 책임이다.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책임이 흔하게 의무, 혹은 자발적인 게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라 오인된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상대의 일상은 상대의 일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도 책임을 느낀다.


세 번째, 존중이다.


존경이란 단어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즉 '존경'이 없다면, 보호와 관심, 책임은 일방적인 지배, 소유 혹은 '착취'가 된다.


그래서 사랑하면 상대가 나의 이익이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성장과 행복을 추구해야지만 상대의 성장과 행복도 함께 응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경은 오직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할 수 있다.


네 번째, 지식이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도 상대에 대한 지식을 바탕에 두지 않으면 맹목적이거나 일방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지식도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이 공허할 것이다.


지식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여기서 사랑 안에서의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든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상대가 화를 냈다는 것을 상대가 표현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나아가 상대가 화를 냈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그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가 불안하고 근심에 쌓여 있으며, 외로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의 화가 마음속 더욱 깊은 어떤 것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을 알게 되고 나는 이제 상대를 단순히 화를 낸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로워하는 사람으로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뿐 아니라 나 스스로의 모습도 찾아내고, 서로는 그렇게 함께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 마음이 연결되어 함께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이 처럼 4가지 요소가 깊게 결합되었기에, 이 4가지가 내 안에서 그리고 상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홀로 또는 함께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는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사람들은 직장 일을 떠나서는 자기만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나 기회가 너무 적다. 그래서 내가 홀로 자립할 수 없어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 고독감을 피하려고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앞선 글에서 언급한 대로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게 된다.


즉,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홀로 있으려고 해 본 사람은 누구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홀로 있으면 괜한 조바심을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 상당한 불안까지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기보다는 오히려 퇴근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어려운 업무를 생각하고, 저녁에는 어디에 갈까 생각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할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는 게 더 쉽다고 느낀다. 하지만 도망치면 도망치려고 할수록, 행복해야 하는 시간에도 불쑥불쑥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갖 상념을 마음속에서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래서 늘 명상을 추천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을 맞춰나가 보자. 어떠한 생각을 지우려고 하지 말고 단지 호흡을 따라가 보자. 호흡을 느끼고, 더 나아가 '나' 곧 내 힘의 중심으로서의, 나의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나 자신을 느껴보자. 사랑은 늘 당신 마음 안에 있다.






한 때 '좋은 연애 상대 알아보는 법' 등 연애와 사랑에 대해 지침을 주는 글은 지나치지 못한 때가 있었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하기가 어렵고 매번 실패를 하는 것인지 자괴감에 빠져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상대를 잘 고르는 안목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쯤으로 알았다. 그 말은 지금 돌이켜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분명, 좋은 상대를 판별하는 좋은 안목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좋은 안목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 본 사람이야말로 좋은 안목을 가질 수 있다.


난 이 글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그 고민과 성찰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삶에 늘 사랑이 숨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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