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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ld P Jul 15. 2024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 : 스톡홀름의 모두를 위한 공간

For 삼성물산 건설부문 From Bold P

사진: Unsplash/Adam Gavlák


해가 저물지 않는 여름의 도시

여행의 추억 중에서도 여름이면 으레 떠오르는 곳이 있다. 해가 지지 않는 한여름의 스톡홀름은 밤 12시가 되어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아 비현실적인 감흥을 준다. 한국과 비교해 습도가 높지 않은 북유럽의 여름은 지칠 만큼 더운 경우가 많지 않고, 하루 종일 낮인 듯한 풍경은 여름마저 결코 저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오피스 건물 안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바삐 다니다가 오후 4시에 가까워지면 어느새 텅 비었다. 스웨덴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했다.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한 스웨덴 사람들은 그제야 하루의 두 번째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현지인의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하루 48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뜻처럼 느껴 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가장 긴 스웨덴 여행을 꿈꾼다면 여름에 떠나야 한다. 스톡홀름은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을 중심으로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 애니메이션 배경으로 알려진 감라스탄은 궁전과 스톡홀름 대성당, 노벨상 뮤지엄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유적들이, 그 옆 셉스홀멘 섬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동쪽 끝 섬인 유르고르덴은 로젠달 정원을 비롯해 식물원과 동물원, 공원이 밀집돼 있어 스톡홀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쪽을 많이 찾게 된다. 



CHAPTER 1.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 : 노르딕 신고전주의의 정점

스웨덴을 대표하는 건축가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를 따라가는 여정은 그리 숨가쁘지 않다. 1885년생으로 스웨덴 건축사를 이끈 건축가는 평생 남긴 건축물이 많은 편이 아니다. 100년 전엔 지금의 건축가들과 달리 동시다발적인 설게 작업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동시대 어깨를 나란히 한 동갑내기 건축가 시구르트 레베렌츠보다 대외적으로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의 이름이 알려진 건 두 건축가의 성향이 서로 다른 탓도 있지만, 스톡홀름을 여행할 때 필수 코스로 알려진 ‘스톡홀름 공공도서관’이 한몫 한다. 붉은 벽돌의 네모난 상자 위에 원통이 얹어진 형상의 공공도서관은 스톡홀름 북쪽, 바사스타덴 지구에 위치해 근처의 공원과 어우러진다. 노르딕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축물답게 외관은 장식성 없이 기능적으로 설계됐지만 내부는 하얀색 벽면과 은은한 조명, 200만 권이 넘는 도서들의 향연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약간 폐쇄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라면 원형홀의 열람실은 3층 규모의 서가 위로 층고가 높아 개방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회자되는 이유가 이해될 만큼, 1928년 문을 열어 역사가 오래된 도서관인데도 특유의 기품과 세련된 분위기가 서려 있다.  

스웨덴 왕립공과대학교를 졸업 후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한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는 젊은 날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중세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가 활약하던 1910년대는 기능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물결이 밀려오던 때였다. 신고전주의 양식에 모더니즘의 기능성을 자연스럽게 더한 그는 공공도서관을 설계하기 전 1924년 극장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스칸디아 극장’은 공공도서관보다 4년 먼저 문을 열었는데, 마찬가지로 외관에 비해 내부는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보여 곳곳의 벽화와 조각 장식 등 중세의 건축물처럼 다소 화려한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이 일대 회토리예트 광장은 일요일마다 골동품 플리마켓으로 변모해 건축 여정을 하면서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스톡홀름 공공도서관 Unsplash/Alexandre Van Thuan


CHAPTER 2. 모두가 누려야 할 좋은 공간

스톡홀름에 공공도서관과 극장, 식물원, 공원 등이 속속 생겨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공공 시설물에 대해 ‘모두가 누릴 공간’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 달리 1920년대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고 건축이나 디자인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스웨덴은 어떤 나라보다 건축과 디자인으로의 공공 복지 실현을 일찌감치 고민하고 실행에 옮긴 나라다. 여기에는 스웨덴의 저명한 사상가 엘렌 케이의 가치관이 자연스레 스며든 덕분이기도 한데, 그는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마땅히 좋은 인테리어와 디자인을 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유럽 디자인의 본질 역시 이 사상을 기저로 하며, ‘이케아’와 ‘H&M’처럼 저렴하면서 유용하고 심미적인 세계적인 브랜드가 스웨덴에서 탄생한 것 역시 이런 사상적 토대와 별개로 얘기할 수 없다.


© 유네스코/Ko Hon Chiu Vincent


모두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공간은 개인의 집보다는 공원, 도서관, 문화센터, 공동묘지처럼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고, 그래서 스웨덴의 내로라하는 건축물이나 디자인은 공공 시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공간이 스톡홀름 남부의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우드랜드)이다. 죽은 자를 위한 안식처, 엄숙하게 닫힌 공간으로 인식되던 공동묘지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재해석한 묘지는 에릭 군나르 아스푸룬드와 시구르트 레베렌츠가 현상 공모를 통해 설계한 것이다. 채석장이었던 지역을 언덕과 채플들, 소나무 군락지, 대형 십자가 조형물 등을 배치해 고즈넉한 공원처럼 조성했는데, 입구부터 초록빛의 널따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의 거대한 십자가 풍경은 마치 사람들이 사후의 세계로 믿는 천국을 실현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길을 따라 산책하듯 가볍게 음료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보통의 공원과 다름없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은 1994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고차원적 건축, 조경이 아님에도 성공적으로 환경과 융화시킨 20세기 건축의 모범”이라는 가치 평가를 받았다. 이곳엔 군나르 아스푸룬드뿐만 아니라 전설적인 할리우드 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뮤지션 아비치 등 스웨덴의 명사들이 안장됐다. 2020년에는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기도 했으며, 온라인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개인을 위한 주택 설계의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 군나르 아스푸룬드는 경력의 전성기를 지날 무렵 스톡홀름 최남단 샌드빅 지역에 가족을 위한 여름 별장을 마련했다. ‘여름의 집’이라고 부르는 가로로 긴 단층 건물은 스웨덴의 소박한 민가처럼 설계했고 독특하게도 남북향으로 배치했다. 채광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배치지만 집 뒤 편의 웅장한 바위 언덕과 바다가 깊게 파고 들어온 앞쪽의 만을 고려해 지형이 만들어낸 방향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 건축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앞서 선보인 그 어떤 작품들보다 군나르 아스푸룬드만의 사적인 취향이 녹아 있는 여름의 집은 그의 가족들이 지금도 여전히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언제나 스웨덴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하던 건축가는 아마도 이런 미래를 상상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유일한 공간을 설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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