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삼성물산 건설부문 From Bold P
국토의 70퍼센트가 숲과 호수로 이뤄진 자연의 나라, 핀란드. 한 예능에 등장한 핀란드인들이 청소년 시절 버섯 따는 게 놀이었다는 얘기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핀란드의 모든 국민들이 그렇듯,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작품을 얘기할 때도 자연은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핀란드의 자연과 디자인을 유기적으로 엮는 여정
알토의 건축물을 따라 가는 여정은 헬싱키에서다. 여느 북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핀란드의 수도 또한 기다란 지형의 가장 남쪽에 있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는 날씨와 시간을 특별히 신경 써야 한다. 적도에 가까운 헬싱키는 조금 덜하다 해도, 핀란드 전역은 겨울엔 극야 현상으로 낮에도 밤처럼 어두우며 오후 3시쯤엔 거리에 인적이 뚝 끊기고 상가들과 전시관은 동계 단축 운영을 한다. 그러니 정말 원 없이 핀란드에서 놀아보고 싶다면 백야 현상이 생기는 하계로 여행 기간을 잡는 게 좋다. 다만 이 또한 새벽 2~3시부터 해가 떠오르는 데다, 밤 11시까지도 날이 완전히 저물지 않으니 뜻하지 않게 불면의 고통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북유럽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1898년 알토는 핀란드의 중서부 쿠오르타네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소년 시절에 경제와 문화, 교육 인프라가 좋았던 중부 도시 위베스퀼레로 옮겨왔고, 이곳에서 인상주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 요나스 헤이스카에게서 드로잉을 배운다. 헬싱키공과대학에 진학해 건축을 공부했던 것마저 마치 자연스러운 운명 같았다. 학생 시절 부모님의 집을 설계할 만큼 건축에 재능이 있었던 그의 초기작은 노르딕 클래시시즘 경향을 보이지만, 동료이자 아내, 아이노 마르시오와 결혼 후 전 유럽을 여행하며 모더니즘과 인터내셔널 스타일에 눈을 뜬다. 다시 핀란드로 돌아온 알토는 초기와는 확연히 달라진 작품 스타일을 보인다. 두 건축가의 만남이 얼마나 좋은 시너지가 났는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굵직한 작업들에서 엿보인다. 그 때문에 알바르 알토 건축 여정의 시작점은 그와 아이노의 공동 공간이었던 ‘알토 하우스’로 삼길 권한다. 직주 근접, 이곳에서 500미터 남짓 떨어진 그의 일터 ‘알토 스튜디오’와 함께 둘러보면 좋은데, 둘 중 어디를 먼저 가도 상관없다.
현재는 박물관이자 알바르 알토 재단으로 사용되는 알토 하우스와 스튜디오의 바깥 외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다. 건축주의 무리한 요구도, 어떤 강요도 없는 오로지 자신과 가족, 작업을 위해 설계한 공간은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품어낸다. 1936년 완공된 공간은 독일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현대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마스터 하우스’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했다. 알토가 건축적 철학을 누구에게, 어디에서 수혈 받았는지 알 만하다. 알토 하우스 내부로 들어가면 핀란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작나무 합판으로 제작한 테이블과 의자 등 가구들이 놓여있고 공간을 분리하는 커다란 미닫이 문이 있다.
합판을 이용한 가구 제작은 단순히 연장들을 이용해 조립하는 것이 아닌, 증기를 이용해 구부려 만든 것이다. ‘벤트 플라이우드’ 방식은 당시만해도 획기적인 신기술로, 알토의 인장과도 다름없다. ‘스툴60’, ‘티 트롤리 900’, 라운지체어와 암체어 시리즈, 구불구불한 화병들로 상징되는 유기적 디자인은 알토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나무, 북유럽의 자작나무를 소재로 핀란드의 호수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헬싱키 재팬 클럽’의 창립자였던 만큼 알토는 일본 전통 건축에 상당히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미닫이 문과 다다미 같은 인테리어들은 바로 그 증거다. 핀란드의 자연과 동양의 전통 가옥의 특징을 유려하게 엮어 알토는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건축, 알토의 공공건축
알토 하우스에서 알토의 손길을 느꼈다면 헬싱키 외곽의 ‘알토 대학교’로 가보자. 알토가 졸업한 ‘헬싱키공과대학’과 ‘헬싱키경제대학’, ‘헬싱키예술디자인대학’이 합쳐져 2010년 재탄생한 공립대학이다. 1949년부터 마스터플랜으로 알토가 설계한 대학 건물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붉은 벽돌과 구리를 주재료로 사용해 지었으며, 대체로 대학 건축물들을 설계할 때 대학 본부 등 메인 건물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알토는 건물마다의 독립성을 부여해 캠퍼스를 하나의 유기적인 도시처럼 조성했다. 이쯤 되면 그를 상징하는 부채꼴 모양의 강의실 건물과 직선들로 이뤄진 대학 도서관은 알토 건축물만의 이제 어떤 표식처럼 느껴진다.
북유럽 디자인을 얘기할 때 공공디자인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건축에 대해선 잘 모르더라도 북유럽 국가를 찾으면 일단 도시의 여러 공공 시설을 방문하자. 발 딛고 선 그곳이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작업한 공간일 확률이 높다. 알토 역시 정부 기관, 학교, 도서관, 교회 등 공공 시설을 많이 디자인했는데, 핀란드 국민 연금 센터 ‘KELA’는 그런 알토의 공공건축물의 중심축이 되는 작품이다. 알토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적벽돌을 외벽 소재로 사용하고 큰 창을 설계해 해가 잘 들지 않는 동계에도 채광이 충분히 내부로 쏟아지도록 만들었다. 고객을 위한 상담 창구는 나무로 제작하고, 구리를 사용해 섬세하게 창틀 등을 마감했는데, 손잡이와 몰딩을 비롯한 공간 곳곳에서 발견하는 구리 소재는 경직된 분위기로 흐를 수 있는 관공서의 인테리어를 한층 부드럽고 고급스럽게 만든다. 바닥과 벽면의 가느다란 직선 타일의 반복은 지금 보아도 세련된 느낌을 주며 현대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는 최신의 북유럽 디자인 그 자체다.
센터에서 남쪽으로 2킬로미터 남짓 내려오면 헬싱키의 문화 예술 센터 ‘핀란디아 홀’에 닿는다.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디아’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제2의 애국가일 정도로 국민 애창곡인데, 곡명에서 명칭을 따온 핀란디아 홀은 노래만큼이나 핀란드인들의 국민 정서를 녹여낸 공간이다. 수직과 수평의 외관 디자인이 특징으로, 겉은 다소 평범해 보이나 내부는 섬세한 조형미와 유기적인 곡선으로 채우는 알토만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홀 안에는 노르딕 퀴진의 진수를 맛보는 레스토랑과 알토가 디자인한 가구들로 꾸민 카페가 있어 여정 중 잠시 쉬어 가기엔 더할 나위 없다.
핀란디아 홀 외에도 알토가 디자인한 건축물과 리빙 제품들을 동시에 누려볼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그 유명한 아카데미아 서점이다. 1955년 헬싱키 중심부에 세워진 서점은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에 등장하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정을 가운데 두고 천장은 유리창을 만들어 자연광이 중정을 통해 전 층에 스며들도록 설계했다. 서점 한쪽엔 ‘카페 알토’가 있다. 알토 재단에서 기부한 조명과 테이블, 아르네 야콥슨의 가구들까지 더해져 알토의 디자인에 매료된 팬과 <카모메 식당> 속 장소를 탐방하는 여행객들은 물론, 북유럽 디자인의 정수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카페는 헬싱키에 방문하면 꼭 한 번쯤 들르는 명소가 됐다. 일본 교토에 분점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알토가 지금의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리빙 브랜드 ‘아르텍’의 제품들로 꾸민 ‘알토 카페 바이 밀도’를 통해 알토와 그의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여행의 묘미는 역시 맛있는 음식을 맛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내는 것이다. 끝으로 서점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알토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 ‘사보이 레스토랑’에 가보자. 1937년 문을 연 호텔은 여전히 운영 중이며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알토 베이스’, 펜던트 조명 ‘A330’, 사이드 테이블 등 알토의 손길이 닿았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창밖으로 탁 트인 에스플라나디 공원을 조망하며 느끼는 핀란드의 음식과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곱씹을수록 담백한 알토 디자인의 맛과 어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