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삼성카드 VIP 매거진 From Bold P, 2019
밀양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은 공간이 많다. 성서적이거나 면학적이거나 토속적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어디를 가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산책자가 된다는 것이다.
명례성지와 한옥 성당
봄이 완연히 무르익는 계절에 사람은 자연과 더 가까워지려고 한다. 밀양은 자연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천연 얼음골이며 빽빽한 산림, '밀양(密陽)'이라는 이름대로 그늘보다 쨍한 빛이 밀도 높게 내리쬔다. 자연 여행의 대명사로 꼽는 밀양에 건축을 보러 간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옥 건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밀양은 자연만큼이나 한옥의 정수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승효상 건축가가 신석복마르코기념성당을 설계해 주목받은 밀양 명례성지에는 오래된 한옥 성당이 있다. 1928년 기와를 얹어 지은 공간은 군더더기 없이 단출한 민도리집 한옥 양식이다. 도리와 장여의 구조로 지은 한옥 형태이지 격식 높은 건축물은 아니다. 하지만 낙동강을 낀 언덕에 지은 데다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팽나무 고목이 있는 풍경은 한옥 특유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지금의 명례성당은 1936년 태풍으로 무너진 한옥의 잔해들을 다시 모아 재건축한 것이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성당 내부의 건축 특징도 흥미롭다. 당시 남녀가 유별한 조선의 풍습에 따라 앉는 자리를 구분 지었고 드나드는 문 또한 분리했다. 솟아 오른 박공지붕 단면을 활용해 제단으로 삼은 것 역시 독특하다. 1950년대 이후에 지은 성당 건축에선 볼 수 없는 요소다. 툇간의 공간 활용도 눈에 띈다. 여전히 성당 안에는 남녀 자리를 나누는 도리가 중앙에 있어 경계를 만든다. 기다랗게 장마루를 깐 바닥에서 옛날같이 좌식으로 앉아 미사를 본다. 그 느낌이 색달라 일부러 이곳을 찾는 가톨릭교도들도 있단다.
한옥 성당을 중심으로 명례성지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는 일은 승효상 건축가와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가 맡았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물은 신석복마르코기념성당이다. 소금과 누룩 장수의 삶을 살았던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에 자리한 건물은 소금이 녹아 흐르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소금 결정체가 연상되는 열두 개의 사각 오브제는 내부로 빛을 투과시킨다. 야외에서 회중석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어두운 성당 내부에서 보면 그 빛들이 각각의 조명처럼 작용한다. 하늘 높이 솟은 기존의 성당 건축 양식과 달라 낯설다. 내부로 들어서면 수도원에 온 듯 중압감도 느껴진다. 미로처럼 설계한 공간을 따라가면 고요와 적막 속의 산책자가 된 듯하다. 이 중심에 신석복 마르코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순수한 한국인 순교자 상을 만들어 달라는 승효상 건축가의 요청에 임옥상 작가가 완성한 작품이다. 가톨릭 건축물이지만 기독교도인 승효상 건축가의 시각과 불교도인 임옥상 작가의 영감이 섞여 종교 화합의 아우라까지 품는다.
"순교는 신앙의 가장 고귀한 형태이며 예수의 삶을 적극적으로 닮은 일입니다. 자신을 경계 밖으로 추방한 이들, 이들의 삶 덕분에 경계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늘 진보해왔습니다. 순교자 신석복의 삶을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곳을 참배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일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과제였지요." 승효상 건축가는 공간을 설계하기에 앞서 종교 기념물로만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성찰하여 우리 내면에 흐르는 존엄성을 발견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명례성지의 건축은 한옥 성당 하나만으로 족하며, 앞으로 들어설 사제관과 수녀관, 방문자 숙소 등은 모두 이곳에 있던 집의 흔적을 찾아 공간을 마련하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덕의 모든 땅이 성지가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앞으로 명례성지 일대를 공간화할 예정인데, 이 모두가 기존의 한옥 성당을 왜소하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배경으로서의 건축을 이룰 것입니다." 승요상 건축가가 강조한 대로 성지 내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 길이되, 명례성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성서의 여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명례성지 곳곳에 박혀 있는 표시를 따라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보는 것이다. 이 길은 가톨릭교도가 아니어도 내면의 감동을 준다. 순례의 끝, 그 길의 마지막에 닿는 공간은 직접 방문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이곳의 백미다.
밀양에서 즐기는 한옥 산책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한옥 성당은 여전히 종교 공간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밀양엔 이런 한옥 건축물이 많다.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출입 금지 팻말은 없다. 조선의 3대 명루라 불리는 영남루도 마찬가지다. 밀양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남루에 오르면 옛사람들이 그랬듯 경치를 구경하며 땀을 식힌다. 단청을 형형색색 복원하지 않고 색이 바랜 대로 둔 모습은 명필가들의 수많은 현판과 어우러져 오히려 멋스럽다. 본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능파당과 계단으로 층층이 이어진 월랑을 따라 침류각이 있어 건물이 더욱 웅장하고 화려해 보인다. 풍류를 즐기는 누각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꽃꽂이 그림과 익살스러운 도깨비 장식 등 영남루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재미도 있다.
영남루와 멀지 않은 교동 밀양향교는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소개되곤 하지만 건축의 미학을 느끼기엔 단연 밀양향교다. 사실 향교는 배움에 매진하는 규범적 공간이었던 만큼 어떤 건축적 기교를 가미할 여지가 없다. 지금도 대부분의 학교가 비슷한 모양새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밀양향교는 옥교산을 뒤에 두고 군자를 양성하는 공간답게 빽빽한 대나무숲을 둘렀다. 입구에 해당하는 풍화루의 작은 문으로 겸손을 행하듯 몸을 숙이고 들어가면 가운데 커다란 명륜당이 보인다. 명륜당 양쪽으로 서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가 있는데 서재에는 평민이, 동재에는 양반이 머물렀다. 현재 밀양향교는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서재는 어린이들을 위한 서가가 되었고, 명륜당은 어른들을 위한 책을 구비해 놓았다. 산책을 즐기듯 향교를 둘러보면 격식에 맞춘 딱딱한 분위기의 여타 향교에 비해 자연과 어우러지며 아기자기한 밀양향교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향교와 이어진 교동 손씨 고택들은 근대 한옥 양식을 보여준다. 1900년 전후에 지은 터라 일본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사용한 자재와 내부 구조가 정통 한옥과 다르다. 특히 99칸 규모의 종갓집은 그 위용이 남다른데, 정원과 마당을 포함한 크기만도 1000평에 이른다. 1900년대 초 미국과 일본 등 5개국의 건축 전문가들이 참여해 한옥과 어우러진 이국적인 인테리어가 특징이라고. 이 여정의 끝으로 밀양에서 누릴 호사는 위양지다. 신라 시대에 축조한 이 저수지 한가운데 안동 권씨 가문의 재실인 완재정이 있다. 풍년을 바라는 염원대로, 쌀처럼 흐드러지게 핀 5월경의 이팝나무꽃이 장관이다. 완재정은 정자 건축을 엿보는 공간으로, 낮은 담장을 둥글게 두르고 작은 방까지 갖췄다. 위양지와 어우러진 풍경이 잘 관리된 정원 같다. 여기엔 선대들이 자연을 활용한 방식까지도 스며 있다. 밀양의 한옥들은 숨은 듯 언제나 열려 있다. 원숙한 내면을 찾듯이 그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