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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ld P Jun 03. 2021

정기용 : 무주의 땅과 감응하는 공공건축 프로젝트

For 삼성물산 건설부문 From Bold P


6월은 산과 들, 우리의 땅에 본격적으로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이맘때쯤 자연과 사람이 가장 선명하게 엿보이는 여행지를 꼽으라면 단연 전북 무주를 말하고 싶다. 그곳에 건축가 정기용 건축가가 심어 놓고 이제야 결실을 보기 시작한 공공 건축물들까지 넣어서 말이다. 


무주 덕유산 국립공원 대집회장, 무주산골영화제 야외 상영 무대 ⓒMJFF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땅, 무주


사심을 담아 6월을 편애한다. 여기엔 6월마다 무주에 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올해로 5년째, ‘무주산골영화제’를 보기 위해 매년 무주를 방문한다. 그때마다 무주란 고장을 섬세하게 눈에 담는다. 처음 대수롭지 않게 무주에 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첩첩산중 덕유산 자락에 너르게 펼쳐져 있는 지방 소도시는 다른 지방 시골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예상치 않게 만난 무주군청의 모던한 건물 모양새나 지방 군청 단위의 건축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작은 광장과 회랑, 군민들이 즐겨 찾는 공설운동장을 등나무로 두른 모습은 어쩐지 한국의 일반적인 농촌 정서와는 다른 감흥을 줬다.

그 생소하고 신선한 분위기의 무주를 얘기할 때면 자연스레 정기용 건축가의 이름이 거론된다. 사람들은 무주에 그가 건축한 건물이 더러 있겠거니 여기겠지만 자그마한 농촌 지역에 30여개에 달하는 공공건축물을 한 사람이 설계했다는 건 도시 전체를 계획한 것과 견줄 만한 사건이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년에 걸쳐 진행한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두고 조성룡 건축가는 “나는 무주 같은 일은 절대 못한다. 무주 프로젝트는 정기용 선생이 아니면 아무리 기회가 있다 해도 이렇게 10년 동안 이뤄질 수 없었다. (중략) 그도 무주만 다녀오면 씩씩대고 욕을 하곤 했다. 그래도 결국은 계속 하더라”는 말로 한국의 관료 사회와의 협업, 서울과 무주를 숱하게 오가며 감리하는 현장의 어려움, 사욕과는 거리가 먼 정기용 건축가의 끈기에 대해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프로젝트 후 정기용 건축가가 펴낸 도서 <감응의 건축>의 첫 장에 붙인 서문도 상당히 의미심장한데 “나는 이 책을 건축가들이나 건축학도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의 건축직 · 기술직 공무원들, 나아가서는 크고 작은 공공건축에 관여하는 모든 공무원들이 읽기를 바라며 특히 지방단체장인 시장 · 군수는 물론 지자체의 의원들도 주의 깊게 애정을 가지고 읽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무주와 이웃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정기용 건축가는 두 살부터 열 일곱 살까지 을지로7가 한옥집에서 살았다. 그때의 집에 대한 기억은 훗날 그가 파리 유학 시절 정교하게 스케치를 해보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볼 만큼 애착이 깊었다. 도시의 부흥기와 함께 집은 스러지고 새로운 공간이 들어서길 반복했지만 어린 시절 집안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오감으로 각인된 ‘집의 기억’은 변치 않는 ‘집의 척도’가 되었다. 

10여 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배운 것은 모더니즘 건축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배운 양식을 따라가기보다는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그로 인해 배제된 것들을 회복해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는 건축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 총체적 결과물이 바로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다. “삶에 제일 근사한 집은 창고 같은 집이다. 세련된 디자인을 가미하고 기능적으로 분할된 공간이 아니라 살던 모든 것을 수용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무주 프로젝트를 대변한다. 특히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로 대표되는 자치센터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는 한때 면사무소라 불리며 일제가 우리 땅을 더욱 집요하고 체계적으로 파헤치기 위해 조직한 행정 기구였지만 이제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기능해야 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공공건축의 이름으로, 정기용의 이름으로


다큐 영화 <말하는 건축가> 스틸컷. 직접 무주 안성면의 주민을 만나 대화하는 정기용 건축가


주민자치센터를 설계하기 전 건축가는 동네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물었다. 열에 아홉은 자치센터 설립엔 시큰둥하고 목욕탕이나 지어 달라고 했다. 시골의 욕실은 변변치 않았고 무주의 면 단위에선 목욕탕이 있는 읍까지 가려면 30여 분 차를 타고 가야 하거나 대전까지 가야했다. 공공을 위한 건물은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공간이 되어야했다. 정기용 건축가는 국내 지자체 기관 최초로 1층에 목욕탕을 설계했다. 유지 관리의 어려움을 생각해 평일 요일에 따라 일본의 료칸처럼 남탕이 되었다 여탕이 된다. 주변 지역 장수, 진안에서 목욕을 오는 사람이 생겨 이후엔 이처럼 작은 목욕탕이 여러 지역에 생겨날 정도로 반응이 좋다. 공간이 들어서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쪽에 보이는 덕유산 자락을 각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로비는 정면이 아닌, 비틀어 설계했고, 안성면을 상징하는 칠연폭포를 느낄 수 있게끔 서쪽엔 물길을 만들었다. 얼핏 밋밋해 보이는 외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넝쿨이 벽을 타고 오르며 계절을 담아 표정을 만들고 있다. 


서창 향토박물관 ⓒ정기용기념사업회/기용건축 건축사 사무소 www.gu-yon.com


정기용 건축가를 무주에 오게 만든 안성면에서 건축 여정을 시작했다면 이어지는 적상면 자치센터도 가보자. 적상면에선 자치센터와 ‘향토박물관’을 함께 보는 게 좋다. 험준한 산세로 조선시대 사고지(史庫址)였던 적상산은 <조선왕조실록>을 숨겨두었던 곳이다. 하얀 타일로 마감했으나 빛바랜, 지극히 관공서다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작업은 2층 건물을 3층으로 조성하며 산책자의 길과 같은 램프를 추가했다. 램프 곳곳에 벽면 프레임을 만들어 주변 풍경을 하나의 작품처럼 느낄 수 있도록 했는데, 이 ‘프레임의 법칙’을 통해 자치센터와 이 일대를 주민들에게 매일 보던 일상적 적상산이 아닌 특별한 풍경으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자치센터에서 1.7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무주서창향토박물관’은 서창마을에 있다. 처음 공사 부지를 본 정기용 건축가는 사고지가 괜히 정해진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적상산 땅의 신성함을 느꼈다고. 경사진 땅에 낮게 세운 필로티 위로 건물이 가볍게 얹어져 있는 형상은 최대한 땅의 지면을 적게 차지하면서 건물이 풍경을 차단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조성했다. 필로티 사이로 보이는 풍경과 건물 주변의 자연 경관이 건물로 인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며 적상산 본연의 신성스러움을 해치지 않는다. 여러 고민 끝에 완성한 건물이지만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인데다, 원래 계획한 설계안과 결과로 남은 건물의 간극, 추후 보완을 했을 때의 박물관 모습에 대한 생각으로 정기용 건축가는 무주 프로젝트 건물 중 가장 마음이 편치 않은 건축물로 이곳을 말했다. 


부남면주민자치센터 ⓒ정기용기념사업회/기용건축 건축사 사무소 www.gu-yon.com


이어서 가볼 곳은 부남면주민자치센터다. 이곳엔 청정 자연 무주의 쏟아지는 별을 관측하는 작은 천문대가 있다. “건축가는 건물만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의미 있게 조직해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오지 같은 부남면을 별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같은 위치에 있되 흩어져 있던 보건소, 복지회관 건물을 천문대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으고 연결시키며 회랑을 통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완공 후 부남면주민자치센터 일대는 산책로 같은 상부 통로에 지붕을 만드는 등, 마을 사람들이 불편한 곳들을 조금씩 손보며 비로소 건축을 완성해 나갔다. 이는 새삼 그에게 건축가의 기본을 알려준 경험이었다. “건축가가 불확정하게 만든 것이 있다면 주민들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재조직할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쌍방향적 건축이다.”


평범하지만 확실한 진실, 감응의 건축


등나무운동장 입구. 출입구는 햇빛의 각도와 입장 시 시선을 고려해 설계됐다. ⓒMJFF


끝으로 정기용 건축가에게 감응 그 자체였던 프로젝트, 무주의 랜드마크가 된 ‘등나무운동장’으로 향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무주군수의 요청으로 공설운동장을 방문한 그는 군수의 고민을 들었다. 군민 행사를 해도 주민들은 오지 않고 직원들만 오는 게 영 맘에 걸려 직접 연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미쳤나?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하는데 우린 땡볕에서 벌 받으라는겐가?’란 대답을 들었단다. 고심 끝에 등나무 240그루를 심었으나 이것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조언을 구한 것이다. 그때 정기용 건축가는 이미 군수가 건축을 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건 등나무가 알아서 할 테니 자신은 등나무의 집만 지으면 됐다. 등나무의 구조와 같이, 아연도금의 지름 6센티미터 원형 파이프 4개를 한 다발로 묶어 반복하는 과정의 연속이 거대한 운동장의 울타리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등나무가 자라는 방향을 원호로 이끌어내고 그 끝을 사람의 시선과 햇빛의 각도를 고려해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등나무 아래서 봄엔 등꽃의 향기를,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느끼며 가벼운 소풍도 즐기게 됐다. “등나무운동장 프로젝트에서 건축가가 한 일이라곤 기껏해야 등나무가 자라나는 구조물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과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완성된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주무대가 되는 등나무운동장 전경 ⓒMJFF


정기용 건축가뿐만 아니라 그의 설계사무소 ‘기용건축’의 실무자들의 속까지 까맣게 태운 무주 프로젝트지만 무주 안성면의 땅을 본 순간 털썩 주저 앉고 싶을 만큼 영적인 끌림을 느꼈다는 정기용 건축가는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그가 무주 땅 이곳저곳에 씨앗처럼 심어 둔 공간은 이제 문화의 성지로 뿌리내리는 중이다. 2013년부터 시작돼 올해 9회를 맞이하는 무주산골영화제의 개막식과 개막작 상영이 이뤄지는 영화제 본부 격인 등나무운동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잊기 어려운 정취를 준다. 태권도원과 청소년수련원, 덕유산국립공원 등 6월이면 영화관으로 변모하는 공간들을 오가며 만나는 무주의 풍경도 그렇다. 물론 등나무운동장처럼 나날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곳도 있지만 방치된 곳들도 있고, 건축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개보수를 진행해 첫 설계와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곳들도 있다. 그러니까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아려지면서 가능하게 된다”는 말은, 무주를 통해 정기용 건축가가 진심으로 감응한 건축의 명제였을 것이다. 


<말하는 건축가> 스틸컷 중 정기용 건축가


*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사적으로 쓰고 싶은 무주, 무주산골영화제, 그리고 정기용 건축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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