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길을 끼고 전쟁의 차가움 대신 새로운 온기를 채워 넣은 역사적인 공간들이 하나씩 공개되고 있다. 무더위가 덮쳐 오기 전, 딱 이맘때쯤 걷기 좋은 재생 건축 산책 코스를 소개한다.
인왕산 자락길 반 나절 건축 산책 추천 코스
딜쿠샤 → 사직단 → 박노수미술관 → 윤동주 하숙집 터 → 인왕산 초소책방 더숲II → 시인의 언덕 → 윤동주문학관 → 경복궁
※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위의 코스로, 몸이 편한 코스를 원한다면 반대로 이동하면 된다. 딜쿠샤나 경복궁에서 여정을 시작해 버스를 타고 바로 윤동주문학관으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코스 중 가장 높은 지대의 장소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므로 체력적으로 덜 힘들다.
1. 딜쿠샤 : 앨버트 W. 테일러 부부의 기쁜 마음으로
2021년 3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앨버트 W. 테일러 부부의 집 ‘딜쿠샤’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재현돼 문을 열었다. 행촌동 권율 장군 집터 부근 신성한 은행나무 옆에 위치한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의미로, 인도 러크나우의 궁전 이름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에서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입국한 미국인 테일러는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와 인도에서 결혼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1924년 딜쿠샤를 짓고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여러 사업을 하면서도 AP 통신원으로 활약한 테일러는 3.1운동과 고종의 장례식, 제암리 학살사건 등 당시 일제의 검열을 피해 세계로 우리나라 소식을 전하곤 했다.
오랜 세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딜쿠샤는 2016년 복원 사업을 시작하며 테일러 부부의 후손들이 기증한 사진과 유품 등을 통해 사실에 가깝게 고증해냈다. 서양식 건축물 안에 한국적인 가구들과 서양의 인테리어 소품들이 배치된 모습은 지금 보아도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한국에 머물며 예술적 감수성을 보여준 메리의 작품들까지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건축적으로 딜쿠샤는 인왕산 끝자락에 있어 한양을 내려다보는 남다른 부지를 자랑하며 3중 구조의 ‘공동벽 쌓기’라는 독특한 벽돌 쌓기 방식이 돋보인다. 국내에선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 기술과 당대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큰 딜쿠샤는 온라인 사전 예약과 현장 방문으로 관람할 수 있으며, 정해진 입장 시간에 맞춰 방문해야 한다.
2. 인왕산 초소책방 더숲II: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남은 초소가 환경을 위한 북카페로
인왕산 자락길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있는 딜쿠샤를 산책의 첫 코스로 정했다면 천천히 사직단 길을 따라 걸어보자. 산자락을 끼고 걷는 코스라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지니 체력을 아끼고 싶다면 버스를 타고 바로 이동해도 좋다. 하지만 산자락에 있기에 매력적인 초소책방인 만큼 가벼운 트레킹 코스를 따라 방문하면 공간의 매력을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곳으로 향하는 길엔 1세대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박노수미술관이 있어 함께 둘러 보기에도 좋다.
인왕산 초소책방은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를 지키기 위한 방호 시설 중 하나인 경찰초소로 지어졌다. 하지만 점차 본래의 목적을 잃어가면서 공공건축가 이충기의 설계로 작년 말 일반인의 걸음을 허용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열린 공간을 주제로 한 건물은 어떤 방향에서든 쉽게 진입할 수 있으며 인왕산 높은 산자락에서 보는 탁 트인 서울 도시뷰를 선사한다. 기존 건물의 흔적인 회색 벽체와 난방용 기름탱크를 그대로 보존해 새로운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공간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았다. 베이커리 카페, 상점, 책방을 겸하며 제로웨이스트, 식물, 기후 문제 등 환경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큐레이션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오르막 산책길을 걸으며 지쳤던 몸으로 중간에 쉬어 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위치이니 다음 코스를 생각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자.
3. 윤동주문학관 : 종로 수도가압장 물탱크가 <자화상>의 우물로
이마에 땀 나는 초소책방까지의 트레킹에 대한 보상처럼 이후부터는 평지와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사직단에서 박노수미술관을 거쳐 초소책방으로 이어지는 누상동 길로 왔다면 오는 길에 시인 윤동주가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머물렀던 하숙집 터를 봤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언덕은 ‘시인의 언덕’으로 조성됐다. 실제로 시인 윤동주가 이곳에 올라 시상(詩想)을 떠올리고 습작을 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이 길에는 한옥 건축과 현대 건축의 절묘함이 돋보이는 ‘청운문학도서관’이 있어 인왕산과 어우러진 남다른 운치의 도서관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언덕을 따라 150미터 남짓 걸으면 윤동주문학관에 닿는다. 건축사사무소 리옹의 이소진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은 원래 수압을 높이는 가압펌프 시설이지만 방치되면서 문학관으로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3개의 전시실로 마련된 문학관은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실내에서 바깥을 볼 때 모두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이는 ‘닫힌 우물’, ‘열린 우물’을 건축적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은유하는 물성으로도 작용한다. 제1전시실이 시인의 흔적을 짚어준다면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은 시인의 시상으로 들어가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 공간 안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고 ‘우물 속 한 사나이’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건물 자체가 전시 대상을 표현하며 건축적인 감동을 주는 경험을 선사한다.
4. 경복궁 생과방 : 공간의 복원이 맛의 복원으로
윤동주문학관 앞 정류장에서는 웬만한 버스가 경복궁을 거치기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좋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조선 최고의 궁궐 경복궁 복원사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 왕실의 다과와 차 등을 전담한 생과방은 비교적 최근 복원을 완료했는데, 단순히 공간을 복원해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방문객에게 왕실 다과를 제공하며 실제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재탄생시켰다. 복식을 잘 차려 입은 생과방의 나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궁에서 왕이 즐겼던 차와 다과를 맛볼 수 있으며, 칸 단위로 자리를 나누어 앉는 것에서 한국적 건축 개념을 새삼 이해하게 된다. 우리나라 한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지엄한 한옥에서 창호문 밖 작은 정원을 보며 즐기는 다과의 맛과 궁궐 운치는 반나절을 걷고 보느라 고단했던 몸과 머리의 열기를 식혀준다. 1일 40개 한정판매로만 맛볼 수 있는 서여향병, 궁중 잔치에 빠지지 않던 주악, 열과 갈증을 삭여주는 오미자차 등 다채로운 다과를 맛볼 수 있는 생과방 궁중 다과 프로그램은 예약이 어려우므로 서둘러야한다.
※ 2021년 기준 작성된 콘텐츠로 현재 정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