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사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1991년 김학순의 증언이 있었을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신문을 읽기 시작한 나이부터 '위안부'와 관련된 뉴스를 접했고, '위안부'가 무엇인지 인지한 상태로,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위안부'에 대한 내 인식은 대중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녀이거나 할머니인 사람. 강제로 납치당한 피해자 딱 그 정도. 제대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게 분노했으며, 미니어처 소녀상이나 마리몬드 에코백 등을 사지는 않았지만, 그건 내가 굿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상품화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정대협 관련 모금에 기부는 몇 번 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이 이슈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적당히 선량한 시민. 읽은 적 없지만 마치 다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몇몇 고전들처럼,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지만, ‘위안부’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 여겼다. 당연하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니까.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런 채 분노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궁금하지 않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를 읽다가 책에 언급된 영화 두 편을 보기 위해 책 읽기를 멈춰야 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상태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2부를 시작하기 전 책을 덮고 우선 <귀향>을 플레이했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강제로 포르노를 보는 듯 몹시 불쾌해져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다시 살펴보니 내가 보고 있던 영화는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네. 아, 역시 그렇지, 다시 제대로 <귀향>을 찾아 플레이했는데, 거진 같은 영화다. 보고 있기 어렵다. 하지만 곧장 이어 한 생각은 ‘내가 곡해하고 있나?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이 영화는 국민 펀딩까지 하며 수백만 명이 본 영화잖아. 호평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끝까지 봐야 하나? 이어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구겨진 미간이 펴지지 않아 보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책으로 돌아와 2부를 읽으며, 내가 본 게 맞는구나 확인했다. 안심. 휴, 이어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렇다. 선량한 시민인 나는, 설상가상 무척 모범생이다. 규칙 지키는 것을 선호하고,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렇구나 하고 일단 고분고분 받아들인다.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항상 그랬다. 그렇게 훈련받았고 대부분의 날들을 그렇게 살아왔다. '다시 질문'하기는 커녕 '질문'하기도 어려워하는 사람. 여기까지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을 다 읽기 전의 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을 읽기 시작하며 가장 처음 굵게 밑줄 친 문장은 p79 야마시타 영애가 쓴 글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이 책에 빠져 읽는 동안,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내가 실시간으로 달라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진짜다! 책은 정말 도끼이구나! 이 책은 나를 둘러싸고 꽝꽝 얼어있던 얼음을 쾅쾅 찍어 깨뜨리는구나. 나는 하나도 알지 못했구나. 아는 게 하나도 없었구나. 도끼가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얼음을 거의 남김 없이 깨부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다시 질문하고 다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그런데, 음, 정말 다른가? 책을 다 읽은 지 사흘이 지났고, 나의 지난 사흘은 그 전의 날들과 달랐나? 나는 나만의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나? 갈증이 난다. 깨진 얼음으론 부족하다. 얼음을 모으고, 주전자에 담고, 불을 피우고, 컵을 꺼내와 따뜻한 물을 따라 마시고 싶다.
비슷한 일을 겪은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을 볼 때면, 비슷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해 버리지만, 각자에겐 저마다의 개별적인 삶이 있는 법이다. 이건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언제나 가장 염두에 두려고 애쓰는 생각이다. 책 속에 언급되어 함께 본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속 송신도의 얼굴과 목소리와 행동을 보면서, 한 명의 '위안부'가 내 안에서 한 사람이 되는 걸 목격했다. 그게 정말이지 몹시 신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울다웃다울다웃다 했다. 그리고 거기서 내 얼음 조각을 따뜻한 물로 만들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상상하는 마음, 다시 바라보는 시선, 나에겐 이게 주전자이고 불씨가 될 수도 있겠다. 상상을 불씨 삼아 얼음을 녹여보려고 한다.
사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사흘 전의 나는 얼음이었고 지금의 나는 얼음 조각이다. 언젠간 따뜻한 물도 되겠지. 질문하고, 다시 질문하는 사람이 되는 날도 오겠지. 여전히 몹시 갈증이 나지만 괜찮다. 나의 얼음 조각은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금씩 녹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