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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운 Nov 04. 2017

Made in Barcelona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 판매되는 물건들에는 'Made in Barcelona'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메이드 인 스페인'이 아니라 '메이드 인 바르셀로나'. 이 말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외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작은 가게에서 물건을 팝니다. 그리고 나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한 가지를 더 보태도 좋겠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파도를 담고 있습니다.

'데마노Demano'는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보른 지구에 있다. 보른 지구는 디자이너, 화가들의 작업실이 모여 있어 작고 매력적인 가게들이 많은 곳이다. 데마노는 그중에서 그다지 튀지 않는 가게라 오며가며 자주 지나치면서도 들어가봐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데마노. 우리 말로 해석하면 손으로부터. 조금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니 리사이클링 제품을 판다고 쓰여 있다. 손으로 만든 리사이클링 제품이라니. 그때부터 나는 데마노 앞을 지날 때마다 흘끔, 가게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성큼가게로 들어섰다.


가방이며 지갑 등 제품을 살펴보다가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한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 못 하고, 우리의 스페인어는 너무 서툴다.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여인은 잠깐 말을 멈추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좀 더 젊어 보이는 여인을 데리고 나왔다.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그는 여인의 딸이라고 했다. 이후 스페인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가 오고갔는데, 언제 스페인어를 썼고 영어를 썼는지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만나는 외국인과 이렇게 오래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들을 처음 보는데, 나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 못 하는데, 그런데도 대화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영어로도 스페인어로도 자신 있는 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자랐을 거라고 짐작하고 건넨 질문이었다.

"콜롬비아요. 바르셀로나로 아주 오래전에 이주했어요."

아, 순간 남아 있던 긴장이 모두 풀렸다. 곧장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3년 전에 콜롬비아를 여행했어요."

"보고타요?"

"네 보고타랑 메데진…."

그리고 연이어 홀린 듯 고백했다.

"저는 콜롬비아를 좋아해요."

3년 전,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 숱하게 외쳤던 말을 아주 오랜만에 꺼낸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아마 몹시 수줍어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그는 웃었다. 바르셀로나에 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는 콜롬비아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스스로 전생에 콜롬비아나였을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콜롬비아나이니까. 우리는 생의 어느 지점,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다.

그의 이름은 마르셀라. 데마노의 대표이자 디자이너라는 그는 나보다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도 잘했다. 그의 인내심 덕분에 우리는 이야기를 느리게나마 이어갈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내가 잘 알아듣고 있는지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99년이었어요.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걷다가 버려진 현수막을 봤어요. 재질이며 상태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곤 집에 가져왔죠. 그걸로 가방을 만들었고요. 그게 데마노의 시작이에요."

나도 많이 봤다. 바르셀로나 거리에는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항상 걸려 있으니까. 1년 내내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를 안내하는 현수막은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게 만들 정도로 아주 예쁘다. '바르셀로나는 디자인을 참 잘하는 도시로구나.' 나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17년 전 마르셀라는 현수막의 다음 생애를 생각했다. '이 근사한 현수막으로 가방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현수막은 마르셀라의 손을 거쳐 책가방이나 숄더백이 되었다. 지갑, 노트북 파우치가 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쓰임을 다한 카이트도 마르셀라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가로등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도,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는 카이트 서핑도 바르셀로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 보낼 것들이기도 하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자란 디자이너.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 그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마르셀라는 작업실로 우리를 초대했다. 작업실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시내 외곽에 있었는데,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 거리를 걷는 동안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공간에 가는 일은 늘 설렌다. 게다가 마르셀라를 두 번째 만나는 날이었으니까. 작업실에서는 한창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산 천을 가지고 가방을 만드는 중인 것 같다.

"폐업하는 우산 공장에 가서 남은 천들을 받아왔어요. 그걸로 장바구니나 간단한 가방을 만들죠. 우선 가볍고, 그리고 방수도 된답니다."

한쪽에는 현수막, 카이트 등 재료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현수막 사이를 걷다 보니 내 눈에 낯익은 것들도 보인다.

"어? 이거 작년 메르세 축제 현수막이네요?"

"네, 그거 유명한 화가, 신 스컬리가 그린 그림이에요."

현수막은 바르셀로나 시와 정식으로 계약해서 직접 받는다고 한다. 축제가 끝나면 현수막은 플라스틱으로 분류되어 버려지는데 그중 일부를 가지고 온다. 화가나 사진작가와의 저작권 협상도 모두 완료한 후에 사용한다. 최근에는 에티오피아 후원 공연 주최 측에서 공연 현수막을 활용한 책가방을 주문해 대량 제작하기도 했단다. 그 책가방들은 에티오피아로 보내질 예정이다.


"바르셀로나 거리에 걸리는 대부분의 현수막이 저에게로 와요. 새로운 현수막이 거리에 걸리면 눈여겨보게 되죠. 특히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의 현수막을 발견하면 가슴이 뛰어요."

이곳 사람들은 바르셀로나를 'BAR.CEL.ONA.' 세 음절로 나누어 표현하곤 한다. 카탈루냐어로 바르BAR는 바, 셀CEL은 하늘, 오나ONA는 파도. 바와 하늘과 파도, 바르셀로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세 단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 쌓인 현수막과 카이트, 우산 천들, 그리고 그것들로 만들어진 제품을 보면서 어쩌면 이게 진짜 '메이드 인 바르셀로나'겠구나 생각했다. 쾌청한 하늘 아래서 햇볕을 오랫동안 머금은 현수막과 긴 시간 파도와 바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중해 위를 날아다닌 카이트로 만들어진 가방을 산다는 건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파도, 햇볕과 바람, 시간을 함께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마르셀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내내 가방 하나가 자꾸 눈에 밟혔다. 건물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다란 현수막을 리사이클링해 제작한 가방인데 하나의 현수막에서 200개의 가방이 나왔다고 한다. 몇 개 남지 않은 것 같아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어 당장 사고 싶었지만, 지금 저걸 사겠다고 말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줄 게 뻔해 참았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데마노로 가서 그 가방을 살 것이다. 가방을 멜 때마다 그 순간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나는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앞 높은 건물에 한 계절 걸려 있던 현수막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하늘과 햇볕, 공기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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