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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운 Oct 21. 2017

제제가 사는 세상

고양이를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었다. 몇 년 전, 당시 남자친구가 고양이를 몹시 좋아했다. 데이트를 하는 중에도 '야옹' 소리가 들리면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참치 통조림이랑 소시지 같은 것을 사왔다. 캔을 따서 고양이 근처에 가져다주고는 "옆에 있으면 경계하느라 먹지 않으니 멀리서 지켜봐야 한다"며 내 손을 뒤로 잡아끌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멀찌감치 팔짱을 끼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어두운 곳을 거니는 저 비루한 행색의 동물이 왜 좋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렇게 거리의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데이트를 이어가다가 그와 결혼을 했다. 반 농담으로 말했다.


"담배 끊고 2년 지나면 고양이 키우게 해줄게."

"1년 반."

"콜."



하지만 금연이 뭐 쉬운가, 설마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가는 길, 웨딩카를 운전해준 친구와 함께 인천공항 앞에서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는 기어이 금연에 성공했다.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하얗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왔다. 서울 마장동 빌라 지하 주차장에서 구조된 고양이. 동네에 아무리 전단지를 붙여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구조한 지인이 직접 키우려고 했지만, 낯선 고양이를 집에 들이자 원래 함께 살던 늙은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여기저기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도 했다. 약속한 1년 반을 채우지 못한 때였지만, 남편이 메신저로 자꾸만 보내는 아기 고양이 사진을 보다가 그 미모에 무릎을 꿇고 그만 '오케이'를 해버렸다. 그렇게 제제라는 이름의 하얀 고양이가 우리에게 왔다.



제제는 마장동에서 경기도 용인의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내 무릎 위에서 쉬지 않고 울었다. 겨우 2kg 남짓한 작은 고양이의 무게가 200kg보다 더 큰 무게감으로 느껴지는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제 무를 수도 없고 어쩌지. 울고 있던 제제보다 실은 내가 더 크게 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제와 살면서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사람만 살던 집에서 고양이가 함께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란다 작은 텃밭을 파헤쳐 오줌을 쌌고, 밤새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집어 놓았으며, 외출한 사이 서랍의 비닐을 모두 꺼내 집에 흩어 놓았다. 걸음걸음 따라다니며 깨무는 바람에 팔과 다리에 생긴 작은 상처들이 아물 새가 없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바쁜 일상인데, 끝없이 말썽을 부리는 제제 때문에 하루가 더 버거워 아무것도 모르는 제제를 붙들고 운 적도 있다. 

그때마다, 이 모든 건 네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선택한 것이니 우리가 너에게 맞추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많은 부분을 조금 쉽게 포기할 수 있었고 일상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게 집은 점점 고양이가 살기 좋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베란다의 화분을 모두 처분했고, 더 튼튼한 쓰레기통을 샀다. 내가 제제에게 적응한 만큼 제제도 나와 우리 집에 적응해갔다.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친해졌다. 함께 잘 지냈고, 제제는 대체로 행복해 보였다.



용인 집에서 제주도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제가 좁은 창틀 위에 올라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 바다!' 제제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그때부터 바다 쪽으로 난 창문 아래에 테이블을 하나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는 종종 나란히 그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제주도로 이사 오길 참 잘했구나. 나는 바다를 보는 제제의 부드러운 이마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제제의 세상이 한 뼘 더 넓어졌다.


바르셀로나 우리 집은 한국에서 살던 아파트보다 훨씬 작다. 거의 1/4 크기도 되지 않는다. 제제가 뛰어다닐 공간이 거의 없어서 예전처럼 껑충껑충 놀기가 어렵다. 빛도 하루에 잠깐 들어온다. 그나마 빛이 좀 들어오는 테라스 문을 열어줄까 싶었는데 낡고 허술한 난간 때문에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길까 싶어 문을 열어둘 수가 없다. 창문만 겨우 열어줬지만 거기서 보이는 거라고는 앞집 테라스뿐. 제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고양이에게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이 열악한 공간에서 제제가 찾아낸 곳은 중정이 내려다보이는 침실 창가. 바르셀로나는 대부분의 건물에 '중정' 즉, 중앙 정원이 있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에 채광과 환기를 주로 중정을 통해 하는데, 우리 건물은 다른 건물보다 유난히 커다란 중정을 가지고 있어 디귿자로 복도가 길게 이어지고 한 층에 여덟 세대의 집이 있다.


"너네 집에 하얀 고양이 있지? 나 봤어."

"고양이 엄청 예쁘더라. 이름이 뭐야?"


언제부턴가 건물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해주었다. 우리가 집에 없을 때 제제는 창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러면서 사람들과 친해진 것 같았다. 그중에는 우리가 마주친 적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우리가 모르는 제제의 사생활이 생겼다.


우리 건물 관리인 후안 아저씨는 아침이면 건물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청소한다. 제제는 아저씨가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나 창가로 달려가서 "야옹야옹" 인사를 한다. 그때마다 후안도 창가로 가까이 와 제제에게 인사를 했다. 제제에게 생긴 첫 번째 바르셀로나 친구 후안.

어느 날 충동적으로 "제제야, 아저씨랑 인사할래?" 하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후다닥 달려나간 제제는,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계속 계속 아저씨만 오면 문을 열어달라고 야옹거린다. 후안은 청소를 하다 제제가 고개를 내밀면 청소 도구를 이용해 놀아준다. 제제는 빗자루를 사냥감으로 삼고 숨었다 뛰었다 야단이다. "제제야, 아저씨 청소하시는데 방해하면 안 돼." 괜한 이야기를 해보지만, 후안은 늘 제제와 노는 걸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다. 어느 날은 불쑥 제제 방석을 선물하기도 했다. 비록 제제는 그 방석에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후안에게는 제제가 늘 거기서만 잔다고 인사를 전했다.



위층에 사는 아저씨는 복도를 산책하는 제제를 보면서도 늘 무관심하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집으로 들어가 버리곤 하신다. 고양이가 밖에 나와 있는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다 싶어 신경이 쓰였는데 어느 날 귀갓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층에 내리더니 "너네 고양이 세계에서 제일 예쁨"이라고 시크하게 한 말씀 던지시곤, 집으로 성큼 올라가셨다. 아, 세상에, 아저씨 고마워요.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꼬박꼬박 제제는 우리와 함께 복도 산책을 한다. 천장이 뚫려 있어 파란 하늘이 그대로 보이고, 지나가는 새도 보인다. 옥상에 널린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도 보인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산책 나가는 다른 집에 사는 강아지들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제제야, 하늘 봐봐. 오늘도 바르셀로나 하늘은 무지 파랗다. 그치?"

사랑하는 상대와 아름다운 걸 같이 보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복도 산책을 하다 보면 늘 제제보다 내가 먼저 지겨워지곤 하는데, 제제를 들쳐업고 그만 집으로 들어오려다가도 제제가 하늘을 쳐다보는 것 같으면 들어올 수가 없다. 집 안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까. 


복도에 나갔다 들어오면 하얀 제제의 발이 새까매진다. 먼지가 잔뜩 묻은 발로 곧장 침대 위도 올라오고 옷장에도 들어가지만, 나는 제제의 까만 발을 좋아한다. 복도 대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제제의 발은, 더운 여름 날 차가운 계곡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맨발 같기도 하고, 먼 길 떠나는 우리의 배낭 같기도 하다. 한 발자국 넓어진 제제의 세상 같아서 나는 그 까만 발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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