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축제
언제 여행을 오더라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축제를 즐길 수 있다. 1년 365일 중에 366일이 축제 중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음악 축제, 책 축제, 타파스 축제… 축제 하나가 끝났나 싶으면 곧이어 다른 축제가 시작된다. 무대를 세우고, 천막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새로운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가로등마다 안내 현수막이 걸리고 벽에는 포스터가 붙는데, 그때그때 바뀌는 포스터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직 스페인어에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터에 써 있는 상세 설명보다 로고나 디자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포스터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축제는 정보를 일부러 찾아본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축제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참여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다. 대부분의 축제는 바르셀로나 시내, 즉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지나가다 가볍게 들르면 그만이다.
아예 동네가 주축이 되는 축제들도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나 '동'에서 여는 셈이고 그중에서도 '그라시아 축제Festa Major de Gràcia'가 가장 화려하다고 했다. 그라시아 지구 내 골목 스무 곳 정도를 미리 정한 테마에 따라 꾸미는데 그 모습이 볼 만하단다. 바르셀로나에 오래 산 친구는 여기까지 설명하더니 곧장 덧붙였다.
"밤에도 거리에서 생맥주를 마실 수 있지."
바르셀로나는 밤 11시 이후 술집을 제외한 마트 등 가게에서 술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니 그라시아 축제는 애주가들에게 다른 의미로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에서 생맥주를 파는 그라시아 축제라니. 요란한 음악과 젊음, 청춘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축제가 열리는 그라시아 지구는 바르셀로나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의 동네다.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인데, 소박한 골목 구석구석에 예쁜 카페나 작은 상점들이 콕콕 박혀 있다. 중심가에 비해 집세가 저렴하면서도 살기 좋은 동네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유학생들이 바르셀로나에 오면 처음 자리를 잡는 곳이라고 한다.
같이 간 친구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반짝거린다.
"저기, 2층 오른쪽 창문 보여? 꽃 있는 저기, 내가 처음 살았던 방이야. 밤마다 아래층이 시끄러워서 잠을 설쳤었는데."
다른 친구는 광장 앞에 서더니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여기 바에서 친구들과 모여 밤새 술을 마시곤 했어. 그땐 돈이 없어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밤새 앉아 있기도 했지."
그들의 추억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첫 골목에 발을 들이자마자 알았다. 나의 섣부른 짐작과 달리 이 축제는 젊은이들만의 자리가 아니었다. 축제의 주인공은 아주 당연하게도, 그라시아 지구에 사는 남녀노소 사람들. 그럴 수밖에 없다. 골목마다 꾸며진 장식들은 양쪽 건물 벽과 창문, 테라스를 캔버스나 지지대로 삼고 있었다. 어떤 집은 아예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축제 작업실로 쓰이고 있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집 앞 벽에 기대서서 맥주를 마시고, 할머니는 춤을 추고, 아이는 거리에 펼쳐놓은 임시 테이블에 앉아서 숙제를 했다. 나는 축제를 즐기다 말고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쫓았다. 누가 구경 온 사람이고, 누가 이 골목에 사는 사람인지는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느 광장에서는 헤비메탈이 흐르지만, 골목을 꺾어서 들어가면 기타 공연이 한창이고, 또 다른 광장에서는 포크 음악을 배경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줄지어 춤을 췄다. '물랑루즈', '모차르트 박물관', '사계절' 등 다양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골목의 장식은 화려하기보다 귀여웠는데, 재료는 놀랍게도 대부분 재활용품이었다. 찢어진 우산, 페트병 뚜껑, 커피캡슐 껍데기, 휴지 심지 등을 활용해 사람이나 동물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일주일 동안 열리는 축제를 위해 거의 여덟 달을 준비한단다. 몇 달 전부터 테마를 정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먹다 남은 음료수병 뚜껑과 다 쓴 휴지 심지 를 모으는 시간들을 상상해봤다. 모여서 가위질을 하고 풀칠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싱긋 웃음이 났고, 한 번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라시아 지구 거리를 걷는 동안 떠나지 않았다. 장식 하나하나가 모두 이야기를 담고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는 '바흐셀로나BACHCELONA'라는 축제가 있었다. 축제 기간 동안 성당이나 광장 등 구시가지 구석구석에서 바흐 음악이 연주되었다. 바흐와 바르셀로나를 합친 매력적인 이름에 반해버린 나는, 바흐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공연을 찾아다녔다.
하루는 작은 성당에서 진행된 '바흐 칸타타'라는 합창 공연을 보러갔다. 오랜만에 구두를 꺼내 신고, 원피스를 입고 찾아간 성당에는 이미 관객이 가득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합창단원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나와 노래를 하는데, 그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우리 집 경비원 아저씨가 앞으로 나와 노래를 한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것 같지 않았다. 저틈에서 자주 가는 슈퍼마켓 주인 아주머니를 발견할 것만 같았다. 장을 보러 나온 것 같은 털털한 복장의 동네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저 바르셀로나 시민이었고, 관객들도 그들의 지인이 대부분이었다. '바흐'라는 이름 덕분에 교향악단이 나오는 거창한 공연을 상상했던 나는 그제야 어깨 힘을 풀고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에는 작은 광장에서 '댄싱 바흐'라는 공연을 한다고 해서 다녀오기도 했다. 바흐의 음악에 맞춘 댄서들의 춤을 기대했다.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계단 맨 꼭대기에 앉아 공연을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작 시간이 되자 가벼운 복장을 한 남녀가 등장하더니 계단에 앉아 있던 관객들에게 함께 춤을 추자며 "무대로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기껏해야 두세 명 내려가겠지 싶었다. 그런데 한 명, 또 한 명, 관객들이 무대로 나가기 시작하더니 놀랍게도 어느새 관람석보다 무대에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들은 바흐 음악 연주에 맞춰 스텝을 밟고, 몸을 돌렸다. 춤을 특별하게 잘 추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무릎까지 오는 면 치마를 입고 가방을 뒤로 멘 몸집이 자그마한 백발 할머니의 몸짓이 가볍고 발걸음이 경쾌해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용기 내어 다가가 더듬더듬 짧은 스페인어로 말을 건넸다.
"당신이 최고였어요."
환하게 웃던 그분의 미소는 우리 앞집 아주머니와 아주 닮아 있었다.
그라시아 축제와 바흐셀로나, 두 번의 축제를 경험하며 나는 이 도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에서 축제는 멀리있는 것이 아니었고, 일상 속에서 모두가 공평하게 즐기는 것이었다.
그라시아 지구를 나와, 버스를 타지 않고 그대로 집까지 한참을 걸었다. 걷는 동안 나도 그라시아 지구 사람들 틈에 섞여 가위질하고 풀칠하는 상상을 했다.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켜진 어느 골목에서 모르는 사람과 손을 잡고 왈츠를 추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들처럼 자연스럽게 축제를 즐길 수 있겠지. 다행히도 한동안은 이곳에 머물 테니까. 운이 좋다는 생각이 아주 오랜만에 들었다.
그라시아 축제 Festa Major de Gràcia
일시 : 매년 8월 15~21일
장소 : 바르셀로나 그라시아 지구
웹사이트 : www.festamajordegracia.cat
바흐셀로나 Bachcelona
일시 : 매년 7월
장소 : 바르셀로나 구시가지(고딕 지구, 보른 지구)
웹사이트 : bachcelo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