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훈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였다
아버지는 시간을 낭비하는 걸 못 보는 분이었다. 대학입시에서 재수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 하지 않는 꼴을 못 보셨다. 원하는 직장이든 아니든 간에 졸업하고 맨 처음 결정된 취업자리에 가는 것이 우리 집의 불문율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원칙에 반항하지 못했다. 거제 깡촌에서 올라와 서울 명문대 법대에 들어간 아버지는 경제적인 이유로 졸업은 포기했지만 사법기관의 공무원으로 평생을 일하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당신의 삶에 시간낭비라곤 없었기에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언니들은 때로 울고 때로 고민했지만 대체로 담담하게 차례차례 그 룰의 희생자(이자 수혜자)가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것이 우리 집의 숨겨진 가훈이었다.
방향은 달랐으나 어머니 역시 그 가훈의 숨은 조력자였다. 처녀 시절 우체국에서 일하기도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내조의 길로 들어섰고 평생 딸 넷을 낳아 기르며 빠듯한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내셨다. 도무지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일을 해내시고도 그 위대함을 인정받지 못했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는 딸들이 당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게 되셨던 것 같다. 너희는 능력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 살아라. 살림만 하고 남편 돈 받아쓰면 목소리가 커질 수 없다.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된다. 결혼은 선택이지만 일은 당연하고도 필수 불가결한 것. 그것은 우리에게 가훈을 뛰어넘는 무의식의 가치관이었다.
아버지의 룰을 따라간 언니들의 삶에는 직진만 있었다. 재수해서 조금만 더 좋은 대학에 갔더라면, 취업 준비 기간을 조금만 더 가졌더라면, 먼저 온 작은 기회를 보내고 뒤이어 올 큰 기회를 노릴 여유가 있었더라면,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었다면. 언니들의 수많은 '만약'은 현실이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딸들의 인생 기복을 지켜본 당신의 마음이 어땠는지 다 짐작할 순 없으나 아버지의 잣대는 네 번째 자식인 나를 향했을 때 이미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우리 집에서 휴학계를 내 본 유일한 대학생이었고 유럽으로 배낭여행도 갔다 왔으며 이십 대 후반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 돌연변이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만큼은 우리 넷 중 누구도 피해 가지 못했다. 머리가 크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 연애, 결혼, 출산의 면면은 제각각이었지만 일만큼은 놓지 않고 달려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일에서의 성과가 무엇보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는 믿음이 견고했던 만큼 '일을 잘한다'는 평가가 자존감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여자라서 더 일해야했고 여자라서 더 잘해야했으며 여자라는 이유로 멈춰서는 안되었다. 때로 부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후회했던 순간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 험한 세상에서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돈 벌며 일하는 여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라 일을 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돈 많은 백수가 장래희망인 적도 있었고 건물주로 임대수익을 받는 삶이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결혼할 여자는 일하지 말고 살림만 했으면 좋겠다는 남자 친구의 말에 분노했던 이십 대의 나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결혼하면 일은 그만두고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삼십 대의 어느 날도 있었다. 똑같은 명문대를 나오고 똑같은 라이선스를 땄는데도 남자 동기와 달리 일에서 떠나 살림과 육아에 매몰되는 동성의 친구들이 안타까우면서도 힘들게 낳은 내 아이의 육아에 몰입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겉돌고 있는 워킹맘의 현실이 서글프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일을 했다. 늘 일하기 위해서 준비했고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욕심을 냈고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래도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떤 상황에 밀려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늘 다음 일을 구하기 전까지 좌불안석이었고 또 다른 일에 대한 구상과 계획으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몇 해 전에는 개원을 준비하면서 운 좋게 만들어진 출판의 기회까지 잡느라 거의 일복의 신이 강림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은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관두고 싶은데 계약과 돈과 약속과 상황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밀려가고 있는 거 아닐까?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안다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쨌든 그때 집어치우지 않고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텐데.
재미있는 사실은 최근 들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작 딸들이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신다는 거다. 더 오래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시 공부하겠다는 딸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지지해주셨던 부모님이 정작 그 공부를 마치고 한의사가 되어 일하면서 매일 골머리를 앓는 내게 '그냥 편하게 살지 뭐하러 그렇게 많이 공부해서 힘들게 사냐'고 하신다. 그 말에는 우리를 그렇게 가르친 당신 스스로에 대한 후회가 어렴풋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시절 아버지의 서릿장 같은 불문율에, 어머니의 회한 섞인 가르침에 울고 웃었던 딸들은 이제 부모님의 강건함이 무뎌지는 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내 이름으로 된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이라는 말의 의미가 '내가 일하지 않으면 가족이 굶는다'는 뜻인 걸 알았다. 일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논한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으며 감응했던 시절은 돌아보면 그저 낭만적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일은 기쁜지 슬픈지 행복한지 서러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맹렬하게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나보다 더 맹렬하게 일하는 언니들이 있다. 일로 상처 받고 일에 치이고 일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위로받는다. 우리는 같은 가훈 아래 같은 영혼으로 단련된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결혼은 안 해도 일은 하라'고 배운 여자 1세대로 자랐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터에서 여자의 입지는 좁고 험난하다.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계속 쉬지 않고 일하려면 출산과 육아의 세계로 아예 진입하지 않거나 육아의 노동을 365일 밀착해서 대신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믿고 맡길 누군가(대부분은 우리의 어머니)의 희생 없이 결혼해서 출산한 여자의 지속적인 노동은 불가능하다. 당분간의 경력단절은 필수고 복귀한 뒤에도 수시로 멘탈이 양쪽에서 털려 나간다. 사회가 워킹맘에게 가혹하다고 해서 출산과 육아에 매이지 않고 일하는 여자에게 너그러운 것도 아니다. 결혼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에게 사회가 가하는 무언의 압박(과 오지랖)은 그것대로 여전하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여자로서는 시대를 앞서갔는지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기도 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일을 대하는 자세가 내 생각과는 다른 순간과 맞닥뜨리면 불시에 당한 습격처럼 당황스럽다. 언젠가 같은 주제로 얘기를 나누던 한 친구가 말했다. 일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시킨 것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는 자발적인 노예? 우리나 그랬지, 요즘 애들은 안 그래. 나도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발버둥쳐보지만 일과 자아실현은 당연히 연결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애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날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름을 이해하고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스스로 꼰대는 아닌지 끊임없이 검열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일에 관해 쓰고 싶었다. 여자로서의 어려움, 워킹맘으로서의 서러움, 한의사의 마이너함, 자영업자의 고충이 교차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중간에 진로를 바꾼 경험, 가족과의 동업, 일하면서 글도 쓰는 나날들에 관해. 아버지 세대와 '요즘 애들'사이에서 어른은 되고 싶지만 꼰대는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마흔살에 대해. 이거다! 싶을 때도 있지만 혼란의 연속인 순간이 더 많고 조금씩 나아지는가하면 매일 제자리인 것만 같은 일상에서 그래도 멈추지 않고 일하고 있는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기록으로서. 훗날 일할 나이가 되어 엄마는 어떻게 일했을까를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나의 딸에게도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진료 중에는 집중해서 글 쓸 시간이 별로 없어서
주로 진료가 끝난 뒤 혼자 남아 복약안내서를 쓰다가 남은 시간에(혹은 할 일을 미뤄두고) 씁니다.
야간 진료를 끝내고 불 꺼진 한의원 내 방에 앉아 아무도 시키지 않은 글을 쓰고 있자면
전용 작업실을 가진 작가라도 된 양 호사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그게 요즘 제가 일상에서 누리는 유일한 사치입니다.
[복약안내서를 쓰는 밤. 2019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