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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Apr 27. 2023

복약안내서를 쓰는 밤의 동업자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일하고 있다. 스무살이 갓 넘어 만나 10년 연애하고 10년을 부부로 살았는데 6년 전부터는 서로의 동업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고 동업은 더 미친 짓이라는데 우리는 그 둘을 함께 하는 미친 짓까지 하고 있다.


남편과는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연애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관계는 계속 변했다. 학교에서 만났지만 캠퍼스 커플이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학생과 휴학생으로 시작해 군인과 복학생이 되었다가 군인과 직장인을 거쳐서 남편이 취직하고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되었을 때 거의 헤어질 뻔하다 결혼했다. 한 사람과 오래 연애했으니 질릴 법도 하건만 우리는 상황이 변할 때마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결혼하고 둘다 직장에 다녔던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시절도 잠깐 있었다. 그러다 내가 먼저 한의원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자발적 백수가 되었는데 마침 그 즈음에 회사에 잘 다니던 남편이 자꾸만 '이거 어때?' 하며 사업 아이템을 들고 왔다. 안그래도 혼자 준비하던 게 버거운 차에 아이템이라고 가져온 아이디어도 내눈엔 다 그저그랬다. 그래서 '할거면 차라리 나랑 같이 하자!' 고 당차게 오퍼를 날렸다.


남편이 "콜!!" 을 외친 그날이 우리의 20년 역사를 뒤흔들어놓을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둘 다 백수가 된 그 해 봄, 우리는 도쿄로 여행을 떠났다. 일을 그만두기 전에 겨우겨우 잡아놓은 휴가 계획이었는데 막상 떠나고 보니 기가 막힌 벚꽃 개화시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다이칸야마의 서점, 남편이 좋아하는 이케부쿠로의 참치집을 사이좋게 오갔고 밤마다 나카메구로의 만개한 벚꽃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함께 할 미래를 꿈꾸는 마음도 꽃잎처럼 가볍게 흩날렸다.


돌아보면 그 여행은 우리가 그저 철부지 부부였던 시절의 마지막 한때였다. 벌여놓은 일이 없어 부담이 없었고 아이가 없어 자유로웠다. 아직 진 빚이 없어서 용감했고 그럼에도 꿈이 있어서 무모했다. 돌아보면 그 때만큼 몸이 가벼웠던 때가 없었다. 그걸 젊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로부터 몇년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사업을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사업체에 소속된 직원들, 어쩌다 우리 일에 휘말린 가족들, 태어난 아이, 아이를 부탁드린 부모님... 딸린 식구들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각자의 이름 앞에 생소한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 배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뚝딱거리기 일쑤였다.




     새로운 관계는 익숙한 사람도 전혀 다르게 정의하게 만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만 스쳐도 빤했던 남편이었는데, 함께 일하다 보니 이 사람은 누구지 싶을 때도 많았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언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연인이나 부부일 때보다 스케일은 커지고 볼륨은 높아졌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대판 싸웠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0에서 1이 되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쉬웠을까. 각자 13의 배수와 29의 배수로 살면서 드문드문 만나는 지점마다 그나마 코를 잘 맞춰 두었는데 갑자기 2의 배수와 3의 배수만큼이나 사사건건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나도 남편도 모날대로 모난 '어른이'들이었고, 모서리가 서로 부딪쳐 깎여나갈 때마다 전쟁이었다. 자존심 간의 대격돌이 휩쓸고 지나가면 전장에는 파편처럼 남은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이 난무했다. 보통의 동업자들도 이렇게까지 싸우나? 늘 궁금했다. 시작은 분명 일에서의 의견 차이였는데 사소한 말을 계기로 지옥의 문이 열렸다.


"넌 언제나 그런 식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 문으로 튀어나온 괴물은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지나치게 잘) 알고 지낸 20년 세월이었을 것이다.




     부부가 동업자가 되면 일과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내가 가장 힘들고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게 바로 이 지점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안좋은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 하소연하면서 둘이 맥주한잔 하고 나면 풀리곤 했다. 그런데 같이 일하고부터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도 남편 하나뿐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남편은 내가 밖에 있든 집에 있든 나에게 일 얘기를 하곤 했다. 지금은 안다. 현장에 매몰된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큰 그림과 목표를 생각해 나와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을. 하지만 그 때는 숨이 막혔다. 늘 사업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남편이 사업체질이고 나는 사업과는 맞지 않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런 생각들이 스스로를 더 괴롭혔다.


시간이 지나고 내게도 조금은 시간적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일에서 한발짝 떨어져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에 받은 충격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내게 이런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남편이 얼마나 고민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를 가장 열받게 하는 사람도, 가장 이해하는 사람도 남편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지만 이제는 그게 그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결혼도 사업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남편과 나는 애초에 모든 면에서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대기업 재무 출신인 남편과 패션 에디터 출신인 나, 자료와 데이터의 힘을 믿는 남편과 직감과 즉흥성으로 무장한 나,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얻는 남편과 혼자 있을 때 충전되는 나, 꽉 채운 시간표를 소화하며 쾌감을 느끼는 남편과 멍때릴 시간이 없으면 시들어가는 나...


그러나 함께 일하면서 달라서 참 좋은 점도 있었다. 팀플 하나만 해도 자료 잘 모으는 사람, PPT 잘 만드는 사람, 발표에 자신있는 사람 등 강점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야 손발이 척척 아닌가. 사업은 처리할 일이 매일 백만스물다섯가지도 넘었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상대가 잘하는 게 뭔지 알았다. 그걸 나는 못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남편은 내게 맞지 않는 일을 하느라 힘뺄 시간을 아껴 잘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부가 서로를 일로서 인정하긴 쉽지 않다. 같이 일해본 사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친근한 사람일수록 능력을 폄하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차이를 알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 본질적인 균형이 우리를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이 일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서로의 발을 밟지 않도록 영역을 정리해 나갔고 격돌하지 않고 우회하는 법을 배웠다. 짊어진 것들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만큼 뿌리는 깊고 단단하게 박혔다. 사업도 조금씩 안정되어 가고 목표도 생겼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조금 덜 싸운다.


작년 나의 진료를 조금 줄이고 난 이후부터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등산을 가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에 어딘가 들러서 맥주 한잔 하는 게 루틴이 되었다. 대판 싸우고 들이받은 다음이라도 나설 땐 서먹하지만 신선한 공기 쐬며 걷다보면 뭐 별거냐 싶은 마음이 되곤 했다. '달과산'이라 부르는 이 작은 등산회는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게 균형을 잡아주는 작은 추가 되었다.


배우자와 함께 일하려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일단은 말리고 싶다. 그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키우려는 사람을 일단 말리고 보는 심정과 비슷하다.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점을 견딜 수 없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가? 보통 일할 때의 성격은 함께 일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함께 꾸는 꿈은 힘이 세다. 나 혼자 생각했던 소소한 미래는 남편을 만나 구체적인 현실이 되었다. 분명 우리는 또 싸우고 후회하고 부딪치고 깨지겠지만 그 시절을 겪었기에 알 수 있다. 시작할 때는 필요한지도 몰랐던 '함께할 결심'이 이제서야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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