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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Oct 27. 2022

복약안내서를 쓰는 밤의 슬럼프

어디에나 있는 슬럼프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당장 결정해야 할 처방이 여섯, 써야 할 복약안내서가 아홉 개에 내일의 상담을 준비해야 할 차트가 또 여덟이다. 주중으로 들어야 할 온라인 강의가 세 개나 밀려있고 공부하면서 정리하기로 맘먹은 노트는 시작도 못했다(와중에 노트는 또 샀다). 지금 남아있는 일을 어디까지 쳐 내야 내일 진료에 지장을 받지 않을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평소에는 잽싼 잔머리도 마침맞게 굴러가 주질 않는다. 야근은 일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해야 할 일을 쌓아두고 괜히 시답잖은 일들을 집적거리다 보면 시간이 잘도 흐른다. 미적거린다고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서 마음은 제곱으로 무거워진다. 마음이 무겁다고 효율이 오르는 건 결코 아닌데 눈꺼풀은 마음보다 더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결국 새벽까지 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일들과 자책감을 콤보로 끌어안은 채 잠자리에 든다. 이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 시간이 더 목을 졸라대면 어떻게든 되겠지. 


     에디터로 일할 때 미루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다 망한 건 내 이름으로 나갈 기사 정도였다. 치열하게 고르지 않은 단어들로 쓴 글은 대번에 티가 나서 편집장에게까지 가보기도 전에 데스크에서 까였다("넌 이걸 기사라고 썼니??"). 매서운 질타의 말은 상처였지만 돌이켜보면 대충 쓴 글이 세상에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신 팀장님은 참 고마운 분이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어떻게든' 넘긴 일을 욕하며 막아줄 사람은 나 자신뿐인데 걔는 어제 되게 비효율적으로 밤새고 지금 쓰러져 잔다. 


     게다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한의사가 망칠 수 있는 건 부끄러운 글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의 건강이다. 이 문장의 무게를 생각할 때마다 늘 새롭게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처음에는 처음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익숙해지기는 커녕 부담은 나날이 새로고침 되어 새삼스럽다. 사람의 몸을 대하는 일을 하며 끝내 무뎌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지 모른다. 


     제대로 일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는 지옥에나 갖다 버릴 말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겨를이 없다고 스스로 채찍질해본다. 아무것도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채찍질마저도 느슨해지는 게 문제지만.




     일에서 부진한 상태가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상황,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슬럼프'다. 같은 말을 건축학에서는 아직 굳지 않은 콘크리트의 유동성의 정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쓴다고 하는데, 절묘하게도 내가 경험한 슬럼프의 감각이야말로 채 굳지 않은 시멘트 속으로 발이 점차 빠져드는 것과 같았다. 물렁한 시멘트에 발이 빠져들기 시작하면 어느새 가슴께까지 차오른 압박에 발버둥도 치지 못하게 굳어버린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파묻힌 시멘트가 보이지 않는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부진해지는 이유를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모른다. 일과 관련되지 않은 일상적인 부분은 유지하면서도 일의 핵심에는 좀처럼 침투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면서 시간만 죽인다. 어느 날 갑자기 뮤즈를 잃어버린 예술가가 선 하나를 긋거나 문장 하나를 쓰기 어려운 것처럼 일에서 한 발짝도 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어떤 일에 분명 착수를 하긴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성과가 없거나 결과가 탐탁지 않은 상황이 반복되면 동료들은 의아해하고 보스의 심기는 불편해진다. 왜 이렇게 진행이 안되지. 내가 이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시멘트에 파묻힌 채로 자기 비하의 늪에 내던져진다. 꼬르륵, 바닥까지 가라앉아버리면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에디터로 일할 때는 의외로 슬럼프 같은 건 없었다. 스트레스가 없었냐고? 그럴 리가. 오히려 미친 듯이 계속되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넌 이걸 기사라고 썼니??"). 그 시절의 밑바닥은 날카로운 칼날의 숲이라 계속 달리지 않으면 발이 깊숙이 베일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서있다가 침잠하는 슬럼프보다는 화르르 불살라 다 타버리는 번아웃이 어울렸다. 


     슬럼프가 어울리는 건 지금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대한다. 치료율이든 매출이든 성과가 즉각 심판대 위에 오른다. 진료, 영업, 공부와 콘텐츠 제작의 멀티플레이를 해내야 한다. 스트레스는 많지만 겉보기에는 비슷한 일상이 반복된다. 못한다고 질타해주는 팀장님도 없다. 어느 날 모든 성과가 지지부진하게 느껴질 때면 조금씩 발이 물렁한 시멘트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절대 나의 부진을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 서비스직에게 허락된 슬럼프는 없다, 는 말을 나는 종종 떠올리곤 했다. 슬럼프는커녕 일시적인 컨디션의 저하도 타격이다. 내가 하는 말과 표정이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품질로 연결되기 때문에 아프거나 체력이 떨어진 채로 일하는 것은 곧 서비스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에는 조금쯤 숙취가 있거나 감기 기운이 심해도 어찌어찌 숨길 수 있었는데 현장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 오늘 못쓴 기사는 내일 쓰면 되는데 오늘 제대로 서비스를 받지 못한 고객은 내일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진료 중에는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진료시간 전까지 체력과 정신력을 깨알처럼 그러모아야 한다. 밝게 웃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폭풍같이 공감하고 날카롭게 진단하는 모든 순간에 비슷한 정도로 텐션을 유지하는 것이 신뢰를 주는 서비스의 기반이라고 믿었다. 간판에 불이 꺼지고 나면 그 안에서 울든 토하든 상관없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은 꼭 지키고자 했다. 다음날 진료가 있으면 술은 마시지 않는다. 매일 아침 정신을 맑게 해주는 한약을 마신다. 주 3회의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근무 시간 외에 내내 멍 때리며 보내기도 했고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잔뜩 사고 뭘 샀는지 까먹곤 했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지만 낮의 에너지를 유지하느라 밤의 생각들을 멈추었다. 그러자 진료 이외의 모든 일이 슬럼프 속으로 더 빠르게 가라앉았다.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들어와 버렸다면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걸까.




     꽤 오래 사로잡혔던 슬럼프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화가 나서'였다. 그저 농담 삼아 '분노의 에너지'를 운운할 때에는 실제로 분노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있는지 관심도 없었는데 실제로 맞닥뜨려보니 닥치고 다 깨부술 만큼 가공할 에너지가 튀어나왔다. 정말 화가 나니 이전까지 어떤 긍정의 말로도 꿈쩍하지 않던 발아래 시멘트 덩어리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회의 중에 함께 일하는 남편이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진척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동업자의 입으로 그 말을 듣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해준 동료에게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게 더 분통이 터졌다. 남편과의 회의는 보통 싸우다가 끝나긴 하는데 이날은 상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만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게 달랐다.

     그 길로 뛰쳐나와 씩씩거리며 프로젝트의 목표와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전날 쓰다만 글을 마무리하고 나니 갑자기 실타래가 풀리듯이 새로운 연재의 목차가 술술 써졌다. 미뤘던 강의도 듣고 싶어졌다. 한의원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도 막 떠올라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메모를 채워넣었다. 쌓여있던 일들을 차례차례 해치워버리고 나니 그 밑바닥에 눅눅하게 고여있었던 무기력함이 머쓱하게 말라버렸다. 이제 뭐든 조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빈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일에서만큼은 무한 긍정의 힘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굳게 믿었던 내가 분노로부터 구원받는 느낌은 신선했다. 그 어떤 위로나 배려에도 깨어지지 않았던 슬럼프의 벽이 분노의 킥으로 깨어졌다. 부정적인 에너지도 에너지구나, 그 에너지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구나, 어디로도 발을 뗄 수 없을 때에는 때로 그 힘이 추진력이 될 수도 있구나. 


     그러나 그 작은 실금이 가자마자 나를 자기 비하의 늪으로부터 떠오르게 만든 건 그 사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던 다정한 말들이 만든 부력이었다. 넌 할 수 있어, 너에겐 대단한 재능이 있어,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 그 말들이 없었다면 분노의 킥은 나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늪으로 가라앉게 만들 수도 있었음을 안다. 일에서 나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믿을 수 없는 날들은 온다. 그럴 때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를 믿어야 한다. 그 말들이 일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살아 돌아오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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