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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Jul 29. 2022

복약안내서를 쓰는 밤의 직업이란

직업을 바꾸는 때는 언제인가

     다섯 살 터울의 큰언니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을 앞두고 있던 시절, 아버지는 언니를 앉혀두고 사회의 선배로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그때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그 옆에 나란히 앉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깨너머 들은 얘기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가장 또렷한 메시지는 이거였다. "어떤 일에 있어서 전문가라 말하려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 10년은 일해봐야 한다." 이 문장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새 공책 같던 내 직업관 첫 번째 장 첫 번째 줄에 아로새겨지게 된다.


     실제로 패션 에디터를 그만둔 이후로 마음 한편에 '나는 패션에서는 전문가가 아니구나'라는 시무룩함이 거름망의 찌꺼기처럼 남았다. 전공으로 4년이나 공부해놓고 그 분야에서 10년도 일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다니 이 패배주의자! 끈기가 없어서 전문가도 되지 못한 얄팍한 놈!! 지금도 가끔 힘들어서 다 때려치울까 생각하는데 여기서도 10년을 못 버티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찔끔찔끔 일하다 죽으면 내 묘비에 이렇게 쓰이겠지. '어느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어중이떠중이로 살던 자, 여기에 잠들다.' 


     패션 에디터를 첫 직업으로 일을 시작한 지 20년, 세상은 많이도 달라졌다. 아버지께 전수받은 '십년경력전문가론'과 '일하지않는자먹지도말라니즘'은 여전히 뼈에 새겨져 있지만 요즘 세대에게 이직은 필수고, 퇴사는 꿈이며, 무직도 팔리는 에세이 소재에 불과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의 가치가 물에 빠질까 봐 죽을 둥 살 둥 달려 십 년 버티는 삶보다 간지 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직업이란 어떤 의미일까.


     처음 출간했던 책의 북 토크를 하면서 사람들이 내 책 보다 희한한 이력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고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보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거나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직업을 바꾸는 일이 내게도 쉽지는 않았다. 지난하게 길고 정처 없이 불안한 순간도 많았다. 닥친 현실을 어찌어찌 버텨 여기까지 온 후에는 과정에 대해 굳이 되짚어 보지는 않았었는데, 질문을 받은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직업을 바꾸게 된 서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패션 에디터를 그만둔 것이 4년 차 때였는데 고백하자면 1년 차 때 이미 한 번 그만두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선배들이 '아직 너는 패션 에디터의 ㅍ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고 뜯어말려주었다. 선배들의 말은 옳았고 그때 당장 그 일을 그만두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그만둔 것은 더 잘한 일이었다. 패션 에디터로 일했던 몇 년을 돌이켜보는 마음은 첫사랑을 추억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예쁘고 아련하고 애틋하지만 너와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어.


     패션을 너무 좋아해서 관련된 일을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에 대한 회의가 드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저 야근이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버거워서만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이 연애라면 직업은 결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듯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는 게 늘 좋은 결과로 연결되진 않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흔들린 건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찰나의 트렌드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버티려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유행의 파도를 타고 넘는 초연한 서퍼의 자세가 요구된다. 나는 그 세계에서 나이 먹는 일이 두려웠다. 가장 예리한 감각의 전성기가 초반에 지나고 나면 그다음은 줄곧 내리막길일까 봐 겁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늘 높은 파도 위에 서 있는 멋진 선배도 많았지만 나와는 다른 종족인 것만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호랑이와 호랑이 새끼들 틈에 센척하고 앉은 고양이 같은 기분이었다. 고양이가 산전수전 겪는다고 해서 호랑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냥 산전수전 다 겪은 고양이일 뿐이다.


     한의사를 다음 직업으로 택한 데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개연성이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는 분명 이 직업으로 나이 들어도 좋겠다는 기대였다. 너무나 사랑했고,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끝내 멀어져 버린 세계란 애초에 직업을 갖기에 좋은 분야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매일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냉정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좋았다. 적당히 흥미롭고 공부하면 발전이 정직하게 드러나는 한의사가 나에게는 제격이다.




     이십 대 초반에 겁도 없이 몇 달간의 나 홀로 배낭 여행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비행기 예약부터 동선까지 몇 주간 신나서 준비했는데 정작 출발하기 전날 밤이 되자 후회가 밀려왔다. 무섭고 두렵고 내가 미쳤지 싶고 온갖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준비를 해놔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 여행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였다. 이 경험으로 인생의 진리를 한 가지 깨달았다. 내 앞길을 막는 건 대체로 소심하고 쪼잔한 나 자신이다. 걔가 눈치채기 전에 먼저 질러 버려야 한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은 전개가 빨랐다. 소심하고 주저는 해도 후회는 별로 없는 나 같은 타입은 일단 지르고 보는 게 좋다. 오늘 저지른 일은 후회하지 않는 내일의 내가 수습하면 되니까. 소심한 내가 눈치채기 전에 잽싸게 배수의 진을 쳐버리고 근거 없는 낙천주의를 좀 끼얹은 다음 몸속 깊숙이 숨어있던 빡센 성실함을 소환하면 작전의 완성이다. 9개월간의 재수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수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모의고사마다 반에 꼴찌를 도맡아서 했다. 9 모의고사까지 보고 나니 담임이 불러 '올해는  힘들  같다, 내년을 노려보는  어떻겠냐'라고 했다.  길로 학원을 그만두었다. 인생 기세인데,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옆에 1분도 있고 싶지 않았다. 혼자 방에벽을 보고 앉아 학원 스케줄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생활하면서 남은  달을 버텼다. 쉬는 시간이라곤 테라스에 있는 화분을 구경하며 멍을 때리는 잠깐이 다였다.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달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면 그 길에는 늘 난관이 있다. 내 경우 가장 큰 장벽은 수능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모님의 걱정, 주위의 만류, 부족한 생활비나 부양가족, 실패했을 때 대안이 없다는 불안일 수도 있다. 난관은 어마어마해 보이고 그것 때문에 이 계획이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건 그 길을 가겠다는 결심이고 난관은 난관일 뿐이다. 뻔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난관은 공략법을 찾아 빠르게 돌파하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난이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난관에는 반드시 공략법이 있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 계획은 적당히 세우고 일단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보길. 거기에 미래가 있다.


* 내가 좋아하는 영화 대사,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했던 말이다.



     스무 살 이후의 이력서를 돌이켜보다 문득 저 밑바닥에 곱게 깔려있던 내 직업관 노트 첫 장 첫 줄을 다시 읽어본다. 아버지는 평생을 선비 같은 분이셔서 아주 점잖게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 말은 '초짜일 때는 잘 모르는 법이니 닥치고 더 해보라'는 뜻과 같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반대의견이 있어서 균형이 맞춰지는 법이다. 버티는 힘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직업을 바꿀 때 후회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의 판에서 버틸 수 있으면 버티라는 정반대의 메시지가 먼저다. 그래야 새로 시작하는 과정에서 지치지 않고, 바꾸고 나서도 후회가 없다.


    온갖 이유로 들썩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조언은 내 가벼운 엉덩이에 무게추를 달아주었다. 그렇게 버틴 시간 동안 배운 것들은 지금까지도 유용하다. 엉덩이를 붙이고 끝끝내 일하는 힘이 생겼다. 팀과 협업하는 방법도 배웠다. 제한된 시간 안에 한 편의 글을 써낼 수 있게 되었고 글과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경험했다. 버텨낸 모든 순간의 가치는 버텨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내가 버텨내 얻은 것들이 지금 내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 생각해도 버틸 만큼 버텼다면?


     버텼던 그 힘으로, 이제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다른 세계로 나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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