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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Sep 29. 2017

지긋지긋했지만 떠나보내긴 아쉬운

안녕, 나의 갱년기

월경, 지긋지긋했지만 떠나보내긴 아쉬운


    <응답하라 1988>의 치타 여사 라미란은 문득 달력을 보고 날짜를 세다 한숨을 쉽니다. 30년이 넘게 매달 있어왔던 이벤트를 몇 달째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죠. 이내 정면돌파를 택한 라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불러놓고 '밥은 하는데 설거지는 안 해. 빨래는 각자 해. 그리고 아무도 내 신경 건드리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울적함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어쩐지 나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끝난 것만 같은 마음, 갱년기의 시작이지요.  

세상 강해보였던 엄마의 우울감이 가족에게 미치는 파장은 크지요. 하지만 치타여사! 폐경은 그리 슬퍼할 일이 아니랍니다.


    수십 년간 한 달에 한 번씩 월경으로 인한 번거로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한 번쯤 원망해보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요. 수영강습은 달마다 며칠씩 빠져야 하고, 주기적으로 난데없는 우울감에 시달리면서, 한여름에도 두꺼운 패드에 속옷까지 신경 써야 하고, 여행기간 혹은 중요한 시험과 생리주기가 겹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죠. 호르몬의 지속적인 자극은 자궁에 부담을 주고 암 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의 절반은 모르는 이 고통은 나머지 절반인 여자 혼자 온전히 감당할 몫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생리통으로 아파서 주춤할 때 늘 생각했습니다. 아, 정말이지 생리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40대 후반에 접어들어 문득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지고 양이 적어지면 여자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이대로 생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걸 거야. 가만, 요즘 얼굴이 왜 이렇게 화끈거리지. 평생 잠이 많던 난데, 요즘엔 밤에 잠도 잘 안 오잖아?... 그러고 보니 올해 내 나이가 몇 살이더라. 사춘기 여중생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나이, 평생 지긋지긋했으나 막상 떠나보내기에는 아쉬운 월경의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호르몬 전쟁의 종결 선언


    WHO에 의하면 폐경 임신이나 수유 같은 명확한 유발 원인 없이 12개월간의 연속적 무월경 상태일 경우로 정의됩니다. 연령에 다다라 자연스럽게 도달한 생리적 폐경과 질병으로 인한 수술적 폐경으로 구분되는데, 어느 경우든 마찬가지로 '갱년기'라 불리는 시기는 찾아옵니다. 수술이나 다른 원인에 의한 폐경은 '조기폐경'을 주제로 할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 오늘은 생리적인 폐경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합니다.  


    폐경이 찾아오는 평균 나이는 49세 전후입니다. 수십 년간 여자의 몸을 좌지우지했던 여성 호르몬의 습격은 어느 날 문득 공격의 수위가 낮아집니다. 늘 정해진 날짜에 철벽 같은 대비를 해왔는데 갑자기 예정보다 일찍 공격이 오거나 예정일이 지나도 공격이 오지 않는 때가 늘어나지요. 공격의 위세도 한풀 꺾인 듯하더니 서서히 공격 횟수가 줄어듭니다. 한 달에 한번 유혈 낭자한 '전쟁'을 치러온 여자들은 어느 날 문득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전쟁이, 끝난 겁니다.

  

    매번 거대한 파고로 몰려오던 호르몬의 지배가 사라진 뒤에도 내 몸은 폭군이 사라진 세계에 곧장 적응하지 못합니다. 독재자는 무자비하지만 세계의 질서를 장악해왔고, 호르몬은 '가임(可姙)'이라는 절대원칙을 사수하기 위해 내 몸을 어떤 의미에서 지켜왔거든요. 수십 년간 배란과 함께 자궁 내막이 부풀었다 허물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출혈과 통증 속에 견디어낸 여자의 몸은 호르몬이 사라진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딥니다. 그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

여자가 임신출산을 위해 가임기 내내 져야되는 짐의 무게는 꽤 무겁습니다. 몸의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가 한데 뒤엉켜있죠.



여성호르몬이 사라진 세계: 갱년기 증상 3단계

    갱년기의 증상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급성기와 아급성기, 만성기로 갈수록 나타나는 증상의 카테고리가 조금씩 달라지지요. 시기별로 대표적인 증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급성기 증상 = 혈관 운동성 장애 + 정신적 장애
네 명중 세 명의 여성이 경험, 그중 한 명은 이 증상이 5년까지 지속, 스무 명 중 한 명은 장기간 경험  

    갱년기,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안면홍조'가 대표적입니다. 초기에 두드러지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증상이기도 하지요. 혈관의 운동성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순환 관련 글 '냉증과 열증 사이', 기억하시나요? 호르몬이 혈관 운동성에 미치는 영향은 갱년기에 더욱 커집니다. 주로 얼굴부터 가슴 위쪽으로 혈관이 확장되어 붉어보이고 화끈거리는 열감이 느껴지게 되지요. 한의학에서 이와 같은 증상을 '음허화동' 혹은 '상열하한'이라고 표현합니다. 열은 위로 치받고, 하복부 이하는 오히려 순환이 떨어져 차가워지죠. 


    안면홍조에는 수반되는 증상이 많습니다. 심장보다 위쪽에 있는 혈관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감당하기 위해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릴지도 모릅니다. 얼굴은 화끈거리는데, 신체 일부는 얼음장을 댄 듯 차가워지기도 하지요. 상체의 열감을 식히려고 비 오듯 땀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증세가 심하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수면장애까지 연결되곤 해요. 잠을 못 자면 컨디션이 떨어지고 스트레스에 취약해집니다. 급성기에 나타나는 정신 증상은 '월경이 끝났다'는 심리적인 상실감과 누적된 신체의 스트레스가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아급성기 증상 = 비뇨생식계의 위축 + 교원질 소실
초기부터 서서히 경험의 빈도가 늘어나서 15~20년 사이에 누구나 한 번은 해당 증상을 겪음

    비뇨생식계는 소변과 관련된 장기 + 출산에 관련된 장기 일체를 말합니다. 내장기이기 때문에 부드럽고 촉촉한 점막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축'이란 이 점막이 말라서 뻑뻑해진다는 뜻이죠.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증상이 성교통입니다. 질이 건조해져서 관계를 가질 때 나오던 점액들이 잘 분비되지 않는 거죠. 또 질 점막을 촉촉하게 만드는 점액은 약산성이라 세균이 살기에 나쁜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점액분비가 줄면 질염이 늘기도 합니다. 소변 길인 요도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지고요.


    교원질은 피부, 뼈, 인대 등 인체를 구성하는 단백질 종류예요. 폐경 이후 이 물질이 서서히 줄게 됩니다. 피부의 교원질이 줄면 피부가 얇아지고 건조해집니다. 근육도 약화되어서 요실금을 일으키거나 관절의 통증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폐경 후 첫 5년 안에 몸 전체 교원질의 약 30%가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왼쪽과 같은 상황을 한의학에서는 '음허'라고 합니다. 몸이 말라버리는 음허는 갱년기장애의 가장 큰 원인인 동시에, 동의보감에서 '노화'의 원인 1순위로 꼽힙니다. 


만성 증상 = 골다공증 + 심혈관 및 뇌혈관 질환

    급성기와 아급성기에 일어나는 증상들을 보면, 가임기 내내 '임신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여성호르몬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혈관운동성을 지배하고 질 점막을 촉촉하게 유지하며 피부나 근육의 교원질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 겁니다. 원할 때 원하는 곳에 혈류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 성교가 부드럽게 이루어져서 임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임신이 되었을 경우 자궁근육과 피부를 부드럽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생길지도 모르는 태아에게 공급되어야 할 단백질을 모체에 유지하기 위해서 몸을 지배했던 거지요. 


    만성 증상은 이 임무를 다 하고 사라진 여성호르몬의 부재를 천천히 느끼는 시간이 될 겁니다. 뼈 속의 교원질이 헐거워질 테니 골다공증이 찾아올 수 있고, 혈관의 운동에 문제가 생기고 쓰이지 않은 지방이 축적되면서 심장이나 뇌 같은 중요한 곳에 혈관 장애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성장 호르몬이 줄어들면 아무리 노력해도 키가 크지 않는 것처럼,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 당연히 일어나는 변화로써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요.


    이 모든 변화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시간을 우리는 '갱년기'라 쓰고 '여자의 몸이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시기'라고 읽습니다.  



갱년기 증상 대처법: 도미노 게임 법칙


    갱년기 증상의 특징은 시기별 증상이 도미노식으로 일어난다는 겁니다. 급성기 증상에서 설명했듯이 안면홍조와 상체의 비 오는 듯한 땀으로 생활의 질이 떨어지고 수면장애가 일어나면 우울증이 찾아오기 쉽습니다. 우울감과 같은 정서적인 장애를 겪으면 더욱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식욕에도 저하가 오지요. 그렇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몸에 잘 먹고 잘 자지 못하는 환경은 치명적입니다. 이 단계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아급성기, 만성기의 증상들이 점점 더 거대한 도미노가 되어 몰려올 거예요. 


    요는, 맨 처음 생긴 증상인 '혈관 운동성 장애'를 적극적으로 관리하자는 겁니다. 아직 폐경이 몇 년 더 남았다면 미리 준비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가임기 때 순환이 안되고 혈관의 운동성이 떨어졌던 사람이라면 갱년기에는 그의 몇 곱절로 거대한 혈관 운동성 장애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매우 실감 나는 예고편인 셈이지요.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순환 장애를 개선하는 것은 갱년기에 대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많은 경우 그렇지만 갱년기에도 예방보다 좋은 치료는 없습니다.


도미노는 쓰러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입니다. 처음 한두 개가 쓰러졌을 때 막는 게 관건이에요. 


    폐경이 시작된 여성에게 다가올 증상을 막기 위해서 양방에서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여성 호르몬 보충요법을 고려합니다. 미국의사협회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방식이 유용하다고 보고했는데요. 이후에도 호르몬 요법의 득과 실에 대한 논란과 찬반은 있어 왔습니다. 사용 가능한 범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고요.1) 골다공증이나 심혈관질환은 생명과도 연결되어있고, 드물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모든 치료법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1) Oh, Han Jin. "Perspectives for managing menopause: general introduction." Journal of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49.1 (2006): 4-10.


    한의학에서는 갱년기 장애를 질병이 아니라 노화의 흐름 속에서 파악합니다. 노화는 여러 질환의 배경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병은 아니거든요. 호르몬이 끝날 때가 되어서 끝난 거라면 몸으로서 그게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평생을 가임기로 살았다면 더 많은 여자들의 자궁에 무리가 왔을 테고, 평균수명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만 유전자에 정해진 대로 진행된 자연스러운 폐경이라면 달라진 환경에 더 건강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한의학적 치료의 접근일 겁니다. 


 

완경: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의 이행


    여자의 몸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중에서도 가임기를 시작하는 초경, 가임기를 마무리하는 폐경은 초대형 이벤트에 속합니다. 폐경을 거치면 비로소 여자는 더 이상 임신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자로서 생이 끝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끝나는 건 어디까지나 객체로서의 존재입니다. 혹시 더 있었을지 모르는 자식이라는 객체, 혹시 나의 몸을 통해 2세를 가졌을지 모르는 남성에 대한 성적 존재로서의 객체. 끝난 건 그것뿐입니다. 잠재적 모체로서의 '의무복역기간'이 끝나는 것일 뿐, 나라는 주체는 변함없이 건재하죠. 


   월경기가 마무리되는 과정을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새로운 용어는 정착되지 못했어요. '임신의 가능성이 닫혀버린다(閉)'는 의미의 '폐경'이 아니라 '유전자가 정해놓은 월경의 의무를 완성(完)했다'는 의미의 '완경'이야말로 평균수명이 86세에 달하는 '요즘 여자'에게 꼭 필요한 정의가 아닐까요? 월경의 임무를 완성한 뒤에도 나는 나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삶은 30년이 넘도록 계속될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월경을 끝맺으면서 하나의 장을 넘깁니다. 존재의 끝이 아닌 챕터에서 챕터로의 이행, 지금 당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지 그 뿐이에요. 한때 지긋지긋했지만 떠나기에는 왠지 아쉬운, 그 정도가 딱 적당한 헤어짐의 농도입니다. 담담하게 손 흔들어 주세요. 안녕, 나의 갱년기.




미미최(최혜미)

전직 패션 에디터, 현직 마르지엘라를 입은 한의사입니다.

요즘 여자를 위한 한의원, '달과궁한의원'에서 진료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진료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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