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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 미나

#046. 동방견문록

by 조이진 Nov 03. 2023

동방견문록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에도 심취했다. 이 책에 서술된 내용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 책이 묘사한 세상도 콜럼버스에게는 실재하는 현실 세계였다. 13세기 무렵 실크로드 교역은 절정에 달했다. 몽골의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유라시아를 통일한 이 시기에는 고려의 청자가 유럽 부유층의 식탁을 장식했고, 개성에서는 회회 아비라 불린 이슬람 상인 수만 명이 정착해 가정을 이뤄 살았다. 동과 서는 이미 한 덩이가 되었고, 그때 벌써 지구는 작았다. 이때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실크로드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17년간 살았다. 그 시절 홍콩 마카오 인근의 광저우 지역에는 아랍 상인이 20만 명이나 상주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제노바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서술한 말을 같은 방 죄수 루스티켈로가 덧칠해 글로 옮겨 쓴 모험 여행기다. 루스티켈로는 무용담과 로맨스 이야기 작가였다. 마르코 폴로와 루스티켈로도 황금으로 뒤덮인 환상의 나라를 지어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지팡구Chipangu는 가타이Cathay 동쪽 1,500마일에 있는 섬나라다. 사람들은 희고, 문명화되었으며, 좋은 대접을 받는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단자들이다. 이 나라의 금은 가늠할 수도 없다. 금은 이 나라 땅에서 나오고, 왕명을 내려 금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또 지팡구는 금으로 궁전 지붕을 덮고 마룻바닥을 깔고, 대리석으로 만든 다리를 보석으로 장식하고, 왕은 황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금으로 만든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장례 때 죽은 자의 입에 진주를 물려주는 풍습이 있다”라며 금은보화가 천지에 널려있는 나라로 묘사했다. 이 책에서 반인반수 괴물, 유니콘처럼 뿔 달린 말, 머리 없는 사람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묘사된 신비한 동방세계와 희귀하고 귀중한 물건을 얻기 위해 겪는 위험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런 물건을 유럽에 가져왔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기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상품과 농산물, 향신료의 값은 당연히 매우 비쌌다.

   

<동방견문록> 마르코폴로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24년 동안 동방을 여행하며 체험담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를 카올리 Caoli 즉 고려라고 기록했다.

  가타이 또는 기탄Khitan은 거란의 나라다. 퉁구스와 동북 아시아인의 혼혈인 동호족이 거란족이다. 발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멸망하기 직전 압록강 북쪽 발해와 고구려의 옛 영토 압록강을 근거하여 발해의 명문인 일라Yila 가문이 916년에 요하Liao River를 근거 삼아 요나라를 일으켰다. 스스로 료선 왕조라 했다. 고구려의 ‘려’와 조선의 ‘선’을 합친 이름이다. 거란을 뒤따라 왕씨 건도 918년에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고구려 고씨가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 료선 왕조가 ‘왕건 고려보다 더 큰 려’라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스스로 대료Great Liao라고 했다. 료선 왕조의 요나라가 만리장성 너머 몽골, 신장과 위구르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땅을 모두 차지했다. 이 땅은 모두 옛 조선의 영토였고, 훈민족의 땅이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예들이 다시 주인이 되었다. 훈족 아틸라처럼 료선 왕조는 황제를 아버지Abaoji, Abogi라고 불렀다. 료선 왕조가 흔들릴 때 같은 일라 가문 야율 다시Yelü Dashi가 다시 나라를 이루어 여진의 금나라를 세웠다. 여진은 조선Jusen을 음차해 적은 한자 표기다. 여진도 한가지로 황제를 아버지 또는 어버이라고 불렀다.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있을 무렵 가타이 거란이 원을 침공했다. 원 북쪽 땅에서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그래서 그때 유럽인에게는 가타이가 곧 중국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소개로 가타이는 동아시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일본에 가본 일이 없다. 일본에 오가는 원나라와 아랍 상인들의 과장된 소문에다 과장과 상상을 덧대서 진술했다.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 또는 <백만 가지 이야기II Milione>라는 제목이었다. 그때 중국에서 넘어온 목판 인쇄술로 인쇄되었다. 이 책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모든 내용을 허구라 할 수도 없고, 또 사실이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책을 팔기 위해 작가가 폴로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이유로 그때도 이 책의 이야기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폴로가 진짜 중국에 다녀오기는 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여전히 남아있다. 사실관계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럽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유럽과 지중해 너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동쪽의 세상에 대해 그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은 마르코 폴로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이슬람 지리학자 후르다드-비도 자기 지리서에 왜국을 “와쿠와쿠는 개와 원숭이도 황금으로 만든 목줄을 차고 다니는 나라”로 소개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자 <동방견문록>이 가장 인기 좋은 콘텐츠로 떴다. 280여 종이 출간될 정도였고, 현존하는 필사본만도 120종이나 될 정도다. 이 책도 한동안 유럽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최고의 베스트 셀러였다.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이 아시아를 들여다보는 가장 중요한 창문이었고, 창문 밖 세상에 대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무엇보다도 종말론에 빠진 기독교 세계관에 딱 들어맞는 무한 상상의 보고였다. 짐승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온갖 괴물들은 기독교 신이 창조한 인간과 너무 다른 악마요 사탄의 이미지였다. 보쉬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브뤼헐의 <배반한 천사의 추락> 같은 그림들이 <동방견문록>의 영향을 받아 그려진 그림들이다. <동방견문록>과 비슷한 시기에 여러 동방 여행기가 쓰였다. <십자군 기사 존 맨더빌 경의 여행>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마르코 폴로가 풍요와 신비함의 땅으로 묘사한 가타이와 지팡구는 이후 스페인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들, 그리고 기독교 수도사들의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미래의 신세계 정복자들에게 지팡구는 황금으로 뒤덮인 땅으로 인식되었다. 동방 세계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이나 뜨거운 물에 목욕한다니 충격이었다. 그때 유럽은 귀족들도 한 해에 두세 번밖에 목욕하지 않았다. 일확천금의 땅이었다. 게다가 가타이와 지팡구에 사는 자들은 모두 이단자들이었다. 기독교도들에게 세상에는 기독교를 믿는 자가 아니면 모두 사탄이요 악마였고, 노예였고, 기독교도가 죽여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두 불태워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하는 자들의 자세였다. 기독교도들의 가슴은 요동했고 황금 꿈으로 부풀었다. 유럽의 비유럽,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정복과 식민 지배 그리고 노예무역의 문을 여는 정신적 자극이 되었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열렬한 팬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가타이의 아버지인 그란 칸Gran Khan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마르코 폴로는 그란 칸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세 개의 인도로 나누어 지배한다고 기술했다. 그란 칸이 직접 마중 나와 자신을 영접했다고 했다. 콜럼버스는 자신도 그렇게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는 그란 칸의 영접을 받고, 직접 만나서 금과 향신료를 놓고 협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 중에서도 특히 지팡구 이야기를 좋아했다. <동방견문록> 필사본에 빼곡하게 메모를 달았을 만큼이 환상 가득한 보고서를 진실로 믿었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 때도 이 책은 크게 이바지했다. 콜럼버스는 항해계획을 세울 때 이 책에 나오는 지리학적 정보를 많이 활용했다. 마젤란의 세계 최초 일주도 동방견문록의 영향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마르코 폴로와 맨더빌의 여행기를 충실하게 반영한 세계지도Mapa Mundi가 작성되었다. 그 시기에 여러 지도가 만들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카탈루냐 지도는 중세 지도 가운데 가장 폭넓은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는 이 지도의 맨 마지막 면에 가타이Catato가 그려져 있다. 가장 믿을만한 최신판 지도에 가타이가 기재되었으니 그는 지팡구 이야기가 담긴 동방견문록을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쿠바 땅에 첫발을 디딘 콜럼버스가 내뱉은 첫 마디가 “내가 지금 지팡구에 왔노라”였다. 콜럼버스는 쇄국으로 모든 물건을 수출 금지한 명나라 중국으로 가고 싶었다. 인도는 그 가는 길목이었다. 중국으로 갈 길은 두 가지. 실크로드는 모슬렘에 가로막혔다. 뱃길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를 거쳐 가는 길은 이미 포르투갈이 선점했다. 그 뱃길로 가는 것은 교황이 허락하지 않을 터. 콜럼버스는 뱃사람. 그의 주변에는 바다에 정통한 자들이 많았다.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폴로에게 황금 출입증을 하사했다는 그림(1410~1412). 갈리카디지털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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