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곳에서 일을 하는가? 혹은 어떤 일을 하는가??
제약업계에서 10여년을 훌쩍 넘게 지내오면서 나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경력을 개발해 왔다.대학원에서 신경생물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후 군문제 해결을 위해 국내의 한 제약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크지 않은 회사였고, RnD에 대한 열망이 큰 회사였기에 다양한연구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었고, 그곳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 있어 필요한 비임상시험부터 임상시험까지 전반적인 과정뿐만 아니라, 허가를 받고 약가를 받는 과정에서 시장 자료 분석, 해외 라이센싱 인/아웃, 국내바이오벤쳐와의 협업, 특허출원 등 정말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식약처에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었고, 덕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특허도 하나 남아 있게 되었다. 다양한 업무를 진행하면서 굉장히 어려움도 많았고, 힘들기도 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신약개발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모두 경험해 보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에는 관련된 시스템이 많이 부족했고, 모르는 것이 생길 때마다 업무관련 모임 등에서 강의를 하신 다국적회사에 다니는 전혀 안면도 없는 분들한테 메일을 보내 물어보곤 하면서 업무를 진행하기도 했었다. 결국 신약개발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하다가는 하나도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에는 다국적회사에서 폭발적으로 신약개발을 하면서 국내에서다국가임상시험이 굉장히 활발하게 진행이 될 때였기에, 임상시험 쪽으로 전문성을 쌓아가고자 마음을 굳혔었다. 수 차례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다행히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다국적 제약회사에 입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나의 경력은 보편적인 넓은 업무 범위에서 전문성을 살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선회를 하게 되었다. 국내 회사에서는 시스템과 인력 등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다국적회사에서는 업무 하나하나에 표준작업기준(SOP, StandardOperation Practice)가 잘 갖추어져 있고, 나에게 주어진 업무만을 수행하면되는 업무 이행(Task Delivery)이 더욱 중요했다. 이렇게 새로운 회사에서 4년 정도를 열심히 일했고, 업무강도가 국내회사보다 훨씬 강했지만 수평적 문화와 시스템의 보조 등으로 행복하게 일을 하며, 나는 어느덧 팀장이 되어 6명의 팀원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에서 S 경영대학과 연계하여 진행하는 MBA program에뽑혀 6개월여 동안 팀을 이뤄 수업도 듣고 프로젝트도 진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함께 팀을 이루었던 분들은 다양한 부서의 소속이었는데, 팀의과제를 주도한 것은 마케팅 이사님과 마케팅 팀장님이셨다. 우리 팀의 주제는 Global marketing 이었는데, 팀의 막내로서 열심히 참여했고, 마지막 발표까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global 차원에서 진행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발표했던 팀에 밀려 1등을하지는 못했지만, 고객관계관리(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의 중요성을 리더쉽에 전달할 수 있었고, 회사에 핵심고객관리팀(KAM, Key Account Management)이 생겨나는 단초가 되었으니, 아주 의미 없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아무튼 이때 팀의 막내로 회의실 예약부터, 서기, 발표 등의 모든 일을 열심히 했더니, 함께 팀원으로 계셨던 마케팅 분들이 좋게 봐주셨는지, 마케팅에서 새로이 브랜드 매니져를 채용하는데, 한번 지원해 보라고 기회를 주셨다. 당시 나는 영업이나 마케팅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지원 자체가 불가했는데, 리더쉽 팀에서 예외적으로 허용을 해 주었었다. 그렇다고 인터뷰를 보거나 평가를 받는데 별도의 특혜를 받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마케팅 포지션을 뽑을 때는 짧은 시간 안에 가상의 상황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해야 하는데, 나는 당시 이런 것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마케팅 팀장님께 조언을 구했지만,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혀 아무런 조언을 주시지 않았다. 이 대쪽 같은 분께서는 얼마 전 다른 다국적제약회사의사장님으로 영전을 하셨다. 어찌어찌 머리를 짜내어 간신히 사업계획서 발표와 인터뷰까지 마쳤고 정말 운이 좋게도 내부 외부의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내가 뽑히게 되었다. 하지만, 뽑혔다는 기분도 잠시이고, 포지션 이동에 따라 자리도 이동을 해야하는데, 당시 나는 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고, 인력관리(people management)를 함에 따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내 자리는 다른 팀원들 자리와 떨어진 구석의 넓은 자리에 여유롭게 있었고, 출장 시 KTX를 이용할 때도 특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랜드 매니져가 되니 당장 비좁은 자리로 옮겨야 했고, 그간 누리던 특혜가 전부 없어지게 되었다. 이건 결과적으로 인센티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일종의 강등에 쉽사리 수긍할 수 없었고, 결국 인사부의 부사장님과 면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사장님께서 내 인사이동은 명백한 강등이 맞으며, 대신 경력개발의 기회를 가진 것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마음 고생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내 경력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다. 다시 한번 안정적인 생활과 안녕을 하고 새로운 업무를 익히느라, 환경에적응하느라 야근이 반복되었고 심지어 주말에도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회사생활이 다시 시작된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의 경력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력을 쌓아가기 위해 기존의 경력을 포기하고, 일종의 기득권 조차도 포기해야 했으나,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세상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 동안 RnD와 관련된 업무에 8년여를 근무하면서 제약산업의 근간이 RnD이며, 이 RnD를내가 이끌어가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항상 가슴 속에 있었다. 그러면서 마케팅이나 영업부를 RnD 보다 조금은 낮게 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케팅에 오고나니 RnD 역시 제약산업이라는 커다란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간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나 하는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다.RnD에서 좋은 신약을 개발하면, 그 신약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적절히 전달될 수 있도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마케팅과 영업부이다. 그리고 그 전달의 과정에서 도매, 유통, 수입 부서와 재무, 인사가필요로 하게 된다. 회사의 전반적인 발전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리더쉽팀은 항상 고민하고 있으며, 회사가 어려워 지게 되면 제일 먼저 파이프라인을 정리하면서 RnD 센터와직원들이 먼저 정리되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조직에서 어떤 업무를 하던 간에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모두가 유기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기에 조직이 운영되는 것이다. 이렇게 또 5년여가 흐르면서 나에게는 마케팅 본부장이라는 호칭과 함께 회사의 국내 매출의 절반에 가까운 1,500여억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마케팅 본부장이되기 전에 나는 또다시 경력개발 기회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이루어낸 성과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더 높은 곳으로 승진을 하고 싶었고, 당시 내부적으로 기회가 오지 않아 외부의 기회를 찾아보기도 했었다. 부서의 전무님과도 상의를 했었으나, 뜬금없이 영업부 지점장 해볼 생각이 없냐는 답변만을 듣고는 한동안 전무님과 말도 하지 않고, 속을 썩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마케팅본부장이 될 수 있었다.
반면에 그 즈음회사는 성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인재의 유출이 있었고, 본사 차원에서 인재개발캠페인(People Development Campaign)을 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나는 이 인재개발캠페인의 멤버로 참여하면서 국내에서 캠페인을 진행했었다. 캠페인의 주된 메시지는 회사는 다양성을 가진 인재를 필요로 하고, 다양한 경력개발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사장님과 인터뷰도 하고, 멘토링 면담, 멘토 부스, 멘토 강의 등도 기획해서 진행을 했었다. 그러면서 나 또한 인사부의 상무님과 별도로 면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 상무님께서는 나에게 영업부 지점장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꺼내셨었다. 나는 이미 전무님께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인사부 상무님께서는 본사에서는 다양성(diversity)를 갖춘 인재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국내에서는이러한 다양성을 갖춘 인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내가 RnD를기초하여 마케팅으로 경력을 개발을 해 왔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이 들었고, 여기에 영업 경력만 추가를하면 정말 강력한 다양성을 갖춘 인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팀장을 하다가 강등을하면서 일종의 손해를 보면서 경력을 개발을 했었고, 만약 지점장을 하게 되면, 똑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점장을 하다 보면 또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마케팅 직책을 기준으로 보면 마케팅 내부의 승진이 우선적일 것은 뻔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그리고, 그 때 만약 내가 지점장을 한다고 결정을 했다면 마케팅 본부장이 될 기회는 한참뒤로 연기되었거나 혹은 아예 갖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내가 지점장이 되었다면 또 어떤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고,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경력개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제는 경력개발이 더 이상 수직적으로만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수직적인 경력개발과 수평적 경력개발의 기회를 모두 경험을 했다. 페이스북의 운영책임자(COO, Chief Operation Officer)인 셰릴 샌드버그는 그녀의 저서 린인(Lean In)에서 경력개발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사례를 들며 수직적 경력개발이 아닌 수평적 경력개발의 중요성을이야기했다.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 스스로도 재무장관이었던 래리 서머스(Lawrence Summers)의 비서실장이었다가 당시에는 불확실한 기업의이름뿐인 직책을 받고도 미래의 기회를 보고 입사를 했었다. 그 기업이 구글(Google)이 되었기에 그녀의 선택은 그녀의 수평적 경력개발이 성공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구글에 합류하기를 망설여하던 그녀에게 에릭 슈미트는 로켓에 탈 자리가 있다면 자리를 묻지 않고 타는 게 맞다 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수평적인 이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곳에서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그녀에게 이베이(eBay)의 마케팅이사였던 로리 골러(Lori Goler)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페이스북에 입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로리는 다른 구직자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해왔고, 무슨일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할 때, 셰릴에게 “당신에게 내가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셰릴에게 당면한 문제는 좋은 인재를 뽑는 것이었기에 로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페이스북에 인사팀으로 심지어 직책을 낮추어 입사를 했다. 물론 로리는 뛰어난 성과를 내었고, 곧 승진을 해서 현재는 people@facebook.com 을이끌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어떤 곳에서 일을 하느냐가 어떤 업무를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오로지 위로 승진하는 것만을 바라보며 수직적, 즉 사다리형 경력개발 만이 전부라고 생각을 해 왔다. 이러한 사다리형 경력개발은 단지 위 사람의 엉덩이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나 같은 경우 의도치 않게 수평적 경력개발을 해왔지만, 내심으로 수직적인 경력개발이 전부라고 생각을 해왔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세상을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고, 더 많은 기회들이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렇기에 단지 수직적인 경력개발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수평적인 기회들도 눈 여겨 보며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자세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전에 다국적회사로 이직을 하던 당시에는 다국적회사의 시스템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국적회사에서는 전문분야가 아닌 분야로 기회를 확장해 가기가 오히려 국내회사보다 더 어려운 듯 하다. 특화된 업무 분야에 전문화된 인력을 통해 성과위주의 운영이 주가 되는 경우에 다양성을 갖춘 경력개발은 별로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반면에 국내 사 같은 경우는 순환보직 같은 경우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할 기회가 강제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다국적회사는 그렇기에 빠른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문적인 경력직의 채용이 우선시되고, 국내사의 경우에는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력개발을 하는 편인 듯 하다. 나 같은 경우 다른 곳에 이직을 하고자 알아보았을 때 대부분의 다국적사의 경우는 내 마케팅 경력이 RnD 경력과 섞여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경우가 많았고, 국내사의 경우에는 내 경력의 다양성에 대해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수평적 경력개발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부서장이나 사장이 되고자 할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부서장이나 사장이 될 때는 다양한 경력개발 기회를 갖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수직적 경력개발을 위해서는 수평적 경력개발이 필요하고, 수평적 경력개발을 위해서는 수직적 경력개발을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 중간의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하고 어떤 곳에서 일을 하느냐가 어떤 업무인지 어떤 직책인지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