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사과를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때로는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사과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사과를 해야 하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어찌됐든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은 내가 불편한 상황인 것이고,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은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는 상황은 갑을 관계의 정점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짜증나는 상황인 것이고, 내가 사과를 해야하는데, 하지 않고 넘어가는 상황이라면, 내가 갑을 관계의 갑으로 착각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존중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A 대리는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갑자기 프로젝트가 겹치면서 일의 과부하가 걸렸다. 같은 부서의 B과장이 조금만 도와주면 그래도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을 듯 해서 B 과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과장님, 제가 아직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고 이번 프로젝트가 갑자기 몰려서 그러는데, 오늘 이 부분만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B 과장은 A 대리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 정도도 혼자 못하면 역량이 부족한 거지. 이전 회사는 편하게 일했나 보네. 나 때는 그 보다 많은 프로젝트도 동시에 다 했다고. 한 일주일 밤새면 할 수 있을꺼야.”
B 과장은 A 대리를 남겨놓고 유유히 칼퇴근을 했고, A 대리는 옆 부서의 대학 선배인 C 차장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새로운 회사의 시스템에는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적응할 수도 있었다.
몇 개월 후,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B 과장에게 몇 개의 프로젝트가 겹쳤고, 이번에는 B 과장이 A 대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A 대리, 이번에 나좀 도와줄 수 있을까? 이번에 갑자기 일이 좀 겹쳤는데, 집에 일도 있는데, 혼자 하려니 좀 힘들 거 같아서 말이야.”
A 대리는 지난 번의 일도 있고, 본인의 일도 있고 해서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저도 일이 좀 많은 상태라 손을 빌려드릴 여유가 없네요.”
그러자 B 과장은 빈정이 상했는지, 지난번 일을 꺼내며 A 대리를 자극한다.
“에이 지난 번에 내가 안 도와줬다고 그러는 거야? 미안해. 내가 그 때는 생각이 좀 짧았어. 그런데 내 덕분에 회사 시스템 빨리 파악할 수 있었잖아. 다 자기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내가 생각하고 한 거라니까. 내가 이렇게 사과 하잖아. 이번에 좀 도와줘라.”
여기서 B 과장의 사과를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사과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부탁을 하기 전에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A 대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지, 진심이 담겨 있다거나 진짜로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를 A 대리가 모를 리도 없다. 하지만, B 과장은 오히려 사과를 받지 않는다며 A 대리를 비난한다.
“이렇게까지 사과를 했는데도 안 도와주는 거야? 사람이 사과를 했으면 받아줄 줄도 알고 해야지. 이렇게 속이 좁은 사람인지 몰랐네”
어찌 보면 A대리는 이직한지 얼마 되지 않는 새 회사에서 좋은 성과로 시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을 활용하려다 보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B 과장의 작은 도움일지라도 A 대리에게는 큰 가치 있는 도움이 될 수 있었고, 한마디로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런 A 대리에게 다른일 때문에 바빠서 안 도와준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도움을 주지 않은 B 과장이었다. B 과장은 본인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 도움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없이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사과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진심이담기지 않은 이기적인 사과를 툭 던졌을 뿐이고, 이러한 영혼이 없는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A 대리를 다시금 비난했다.
사과를 주고 받아야 하는 상황은 꼭 갑을 관계가 아니어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사과를 하는 입장과 받는 입장은 갑을 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물질적,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음을 의미한다. 때로는 말 한마디로 사과가 마무리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물질적인 보상이 동반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재판을 할 때도 피해보상의 여부와 합의라는 명목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아닌지에 따라 그 형량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합의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합의를 강요한 경우에는 가중처벌이 되기도 한다. 법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습과 상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즉, 사과를 하는 사람은 받는 사람에게 사과를 수용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찌 보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말이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출발한다. 그런데,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빈 껍데기뿐인 사과는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심을 담아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한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납득할 수 없다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에서 ‘웬만하면 받아주지’라는 말을 쉽게 꺼내서도 안 된다. 실제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의 마음은 그 누구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과에 있어서 만큼은 사과를 받는 사람이 갑의 위치에 있고, 사과를 하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억울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상사의 잘못을 대신해서 혹은 조직의 실수를 대신해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번 건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 D 부장이 책임을 좀 졌으면 좋겠어.”
직장에서는 전결규정이라는 것이 있어 각 직급별로 책임져야 하는 한계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각 직급 별로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은 대리는 500만원까지만, 과장은 1,000만원까지, 차장은 3,000만원, 부장은5,000만원까지이다. 그리고,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업무의 종류에 따라 직급별로 승인과 결제를 받아야 하는 단계별 프로세스이다. 이는 업무와 결제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대리까지 결제한 일에 문제가 생기면 대리가 책임을 지고, 부장까지 결제한 일에 문제가 생기면 부장이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해당 업무와 관련된 모든 책임은 담당 임원과 대표에게 귀속되게 된다. 이것이 직급이 올라갈수록 많은 연봉과 복지, 편의 등의 혜택을 받은 근본적인 이유이다. 해당 임원과 대표는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등에 대한 감시과 감독의 권리와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항상 직급이 올라갈수록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모두 누리면서 그 책임은 항상 누군가에게 떠 넘기게 된다. 그리고 그 넘어온 책임을 지고 대신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사과를 해야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이 또한 누군가의 이기심으로부터 발로된 이기적인 사과의 하나이다.
우리는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누명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면, 황천에 오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도 했다. 내가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를 하려 하니 당연히 진심이 우러나올 수 없다. 내가 지금 당장 억울해서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할 뿐이다.
진심이 담기지 않는 사과는 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없이 가벼운 것이다. 이러한 사과는 당연히 사과를 받는 사람의 마음에 전달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사과의 수용을 강요한다면 또 다른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을 만드는 것 뿐이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용서를 만들어 내고, 가슴 깊숙이 남은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사과는 내 기분이 좋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롯이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기에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군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과의 전제는 내 스스로의 잘못과 실수를 철저히 인정하고 통렬하게 반성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용자(勇者)이기도 하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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