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도 모르는 시절, 너는 종종 나의 내일이 되어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엄마는 홈쇼핑이 늘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누나네 병원은 단축 근무에 들어갔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길 하나 건너 살던 누나는 컴퓨터에 ‘줌'을 깔았고, 코로나가 시작되고 우리집 거실 TV엔 뉴스 채널이 자주 틀어져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가게는 문을 닫거나 배달을 시작했고, 한 달에 한 번 즈음 외식을 하던 우린집은 자주 찾던 고기집에서 도시락 배달을 시켰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코로나가 시작되고.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연 나타난 바이러스 이후, 세상은 갑자기 멈춰 버린 것만 같지만, 그건 정말 멈춰선 ‘일상'일까. 여전히 다시 또 찾아와 흘러가는 하루가 나와 우리, 그리고 내 주변의 일상은 여전히 좀 새롭다.
매일같이 생겨나는 (택배) 박스를 버리러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전에 없던 새소리에, 코로나가 시작하고 나는….집에만 있는 날들을 어쩌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은 주말 오후, 배달 온 ‘고기 도시락'을 마루 상에 가득 펼쳐놓고 엄마는 이렇게 말하셨다. “‘제법 괜찮은데? 혁아, 냉장고에 쌈 좀 내온나.” 이건 어떤 ‘다름'의 내일일까. 어떤 하루가 우리에게 찾아온 걸까. 프리랜서 5년차, 난 어쩌면 가장 보통의 하루, 내 곁에 흘러가는 시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어쩌면 가장 상관없을, 영향이 가장 없을 듯한 나란 사람의 지난 1~2년을 이야기하면, 그건 좀 (다른 사람) 보다 의미심장했는지 모른다. 만남을 자제하고 외출을 삼가고 거리를 두라고 하지만, 내겐 그럴 사람도, 외출을 할 용무도, 그럴만한 ‘거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10년의 회사 생활을 뒤로 병원을 경유해 (엄마의) 집에 돌아와 5년 여.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하루는 한 달이 되기도 했고, 어느새 1년이 흘러있었고, 아무런 ‘답'도 갖지 못한 시간이 잘도 흘러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를 지니지 않은 다자키 츠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다자키 츠크루 처럼, 돌연 달라진 일상은 내게 이미 5년 전 시작됐다. 2019년 어느 봄 무렵이 아니라 2016년 내가 퇴사를 하던, 병원에 입원을 하던 어느 여름녘의 끝자락.
갑작스레 멀어진 친구들과의 묘연한 관계에서 방황하던 츠쿠루 씨의 그 '순례의 시간'이 나름 평온했던 내 일상을 할퀴고 갔다. 10년간 쥐고있던 잡지 기자란 타이틀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자리. 시간. 자국. 이렇다할 사건사고 없이 혼자만 다사다난했던 5년 여. 이름을 갖지 못한 날들은 그래서 힘들었고, 삶에 대한 애착은 그곳에 별로 생겨나지 않았다. 나는 츠쿠루 씨처럼 친구를 찾아 사방팔방 다니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기묘한 꿈이 이어지던 몇 번의 밤은 아직도 기억 속 아침을 기다린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난, 어쩌면 세상이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우리에게 들이닥친 '사건'은 아마 만인 공통, 수많은 ‘할 수 없음’일 것이다. 우리집만 살펴보아도 엄마는 매주 2회 나가시던 노래 교실을 하루 아침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적어도 한 달에 서너 번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나는 요즘 마루의 TV나, 방구석 노트북으로 지나간 영화나 훑고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했던 엄마의 롱 원피스는 아직도 옷장 속, 개봉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안타까운. 그리고 애처로운. 하지만, 별 일 없는, (밖에는) 잘 나가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고, 일을 하는 건 가끔, 대부분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 ‘프리한' 일상에서 그 ‘할 수 없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무런 지장도 없는(을) 것 같지만 어딘가 실패한 것 같고, 볼 일도 없으면서 자꾸만 날씨를 체크하고 창밖을 내다보는 건 무슨 하소연의 표출일까. 동네 빵집에 빵을 사러 나서던 어느 비개인 오후, 난 이건 어쩌면 ‘하지 않았던 것들’의 일상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작아, 사소하기 그지없어 굳이 수첩에 적지도 않았던 것들의 어떤 ‘스타트 라인.’ 주목은 커녕 간과되기 바빴던 일상 구석구석 ‘소소한 일'들의 ‘뒤늦은 활약.’ 멈춰선 자리에서, 뒤쳐져 걷는 걸음엔 남들이 보지 못한 길가의 풍경이 있다. 아마도 그렇다고, 코로나 100일째 비젖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9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오늘은 집에만 14시간 쯤 있었다. 이건 대부분 집에서 보내는 5년의 일상 중 간만의 외출을 하고 돌아온 날의 ‘시간표'인데, 집에서 머물기 시작하며, 정확하게는 그렇게 의식하게 되면서 난 집(에서)의 시간을 종종 생각한다. 회사에 다닐 땐 퇴근 후 출근 전, 그리고 휴일이 아니면 ‘집’에서의 시간이란 그저 씻고 잠을 자고 다시 씻는, 삶의 ‘간이역' 정도밖에 되지않는 분량인데, 집에서 보내는 하루는 보다 넓은 품 속의 하루를 보여준다. 가령 오후 3시 하교하는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나는 언제쯤 들어봤을까.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른 저녁길에 난 왜 다른 한 손에 ‘여유'를 들고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될까. 설거지를 하고 돌아온 방에서의 커피 한 잔은 왜 더 느긋하고, 그 때의 난 왜 조금 더 착하게 느껴질까. 코로나가 시작하고 난, 어쩌면 그제야 ‘집에서 산다'는 말에 ‘안착’했는지 모른다.
일과에 치여 매일이 이유 없이 바쁜 날 속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멈춰선 그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모르던 엄마, 나는 알지 못했던 누나, 오해로 멀어진 너와의 기억과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한 그 말의 리플라이. 그리고 오후의 동네와 평일의 TV 프로그램 같은 것들. 세상은 어쩌면 지금, 내가 보지 못한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5년을 헤매고도 찾지 못했던, 나와 너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곳에 있었다.
혼자가 된 자리에서 수많은 너를 생각한다. 내일은 달력에 적혀있는 것보다 늘 멀고, 날씨는 자꾸만 빗나가지만, 때로는 어제가 더 새롭고 세상은 어쩌면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보지 못했을 뿐, 혹은 스쳐 지나왔을 뿐. 나는 여전히 힘들 땐 영화로 도망가기도 하고, 3분 남짓 유행가에 기대 눈물을 쏟기도 하지만, 세상은 종종 영화이기도 하고,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 모난 마음이 가라앚기도 하는 게 어쩌면 인생이다. 그저 기록되지 않을 뿐. 돌연 우리에게 찾아온 '2m의 거리'는 그런, 가려졌던 한 뼘의 세상이 아닐까. 세상이 잠시 멈춰서 순간, 너는 종종 나의 내일이 되어있었다.
헤더 사진 ©️ eikimori, シボレ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