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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병장수 Oct 03. 2023

자기 앞의 생_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생의 무자비함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무기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하여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수여하는 공쿠르 상을 두 번째로 받게 된 소설. 보편적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삶의 무자비함에 가장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조망하며,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몇 살인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정체감의 혼란을 경험하는 고아 소년 모모는 ‘무조건적인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며 아무 데나 똥을 싸는 퇴행을 하기도 하고, 일부러 눈에 띄게 물건을 훔친 후 주인에게 따귀를 맞는 등의 비행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으로부터 인간적인 다정함을 경험할 때 삶에 대한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모모의 삶은 대부분 고통스러운 나날이었고, 모모는 지옥 같은 현실의 고통을 잊고자 자주 상상이나 공상 속으로 빠져들어 그 속에서 위로를 받지만, 이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로자 아줌마를 지키기 위해 현실로 돌아간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타인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 때로는 나를 숨 막히게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이 미친 세상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어느 날 갑자기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도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창녀 생활을 하는 등 녹록지 않은 삶을 산다. 오십에 창녀 생활을 은퇴한 이후, 불법적으로 친권이 박탈되어 직접 자녀를 키우지 못하는 창녀들에게 돈을 받고 그 자식들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집에서 힘들게 키우며 살아가지만, 결국 혈관성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똥오줌도 못 가리는 무자비한 자연의 법칙 아래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비참한 생을 지속한다.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 밖에 없는 그들은 손에 똥을 묻히며 살아가지만, 로자 아줌마는 가장 싸구려 식재료로도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모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몇 번이고 맹세할 줄 안다. 그리고 모모는 쓰레기더미에서 아직 생기를 유지하는 버려진 꽃들을 주워와서 아줌마에게 선물하고 정신이 나간 아줌마가 정신을 차렸을 때 무섭지 않도록 아줌마 앞에 앉아 있을 줄 안다. 그들은 서툴고 거칠지만 다정하다. 서로에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서로를 아끼며,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존중하는 진정한 사랑을 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기술과 노력이며, 행복은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그들은 사랑의 지난한 과정에서 찰나의 순간이지만 깊이 있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의 깊이는 사랑을 위해 공들인 노력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상처받을까 봐 손해 볼까 봐 두려운 마음은 깊이 있는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만들고, 사랑이 두려운 사람은 상처를 받을 일도 손해를 볼 일도 없겠지만 공허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생의 무자비함은 인간 보다 앞에 있고, 그 아래서 무기력한 인간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삶이, 사람이, 사랑이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고 깔끔하고 완전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엔 전적으로 희거나 검은 것은 없고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으며, 또한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결함 많고 견디기 어려운, 세상의 기준으로는 무가치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서로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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