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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_가와바타 야스나리

경제적 자유가 주는 억압의 역설

by 무병장수 Dec 09. 2024

이례적인 폭설로 출퇴근길에 큰 애를 먹었다며 직장 동료들과 푸념을 하다가 “애들만 신났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문뜩 나도 눈이 오면 신이 났고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좋아했는데, 어쩌다 내가 아름다운 눈을 귀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생각에 잠시 슬퍼졌다. 그래서 절기 대설을 맞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의 첫 문장이 유명한,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낸 설국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68년 일본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7년 처음 출간하여 12년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친 후 1948년 마침내 완결판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섬세하게 겨울 풍경과 열정을 일본 특유의 간접적인 표현 방식으로 감각적이고 관능적이고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책을 읽는 동안 아름다운 겨울 풍광이 구체적으로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막대한 유산을 받아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남자다. 도쿄에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딱히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 삶에서 딱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동기도 의욕도 없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헛수고”라고 말하며 냉소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예를 들어 직업도 일부러 실제 본 적이 없는 서양무용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자비로 책을 출판하는 식으로 허울뿐인 일을 한다. 그러다가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진지함을 잃은 것 같을 때 회복하기 위해 국경의 산을 돌아다니며 무위도식하는 삶의 태도가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사람이다.


그러다가 게이샤 같지 않고 순수하고 깨끗한 고마코를 만나 애정을 느끼지만, 뭐 하나 자기 힘으로 이루고 책임져본 적이 없던 그는 선뜻 그녀를 갖지도 못한다. 애매한 선을 그어놓고는 강아지처럼 그 선을 넘나들며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열정을 실컷 맛보다가 그녀에게 넘어갈 것 같다 싶으면 부리나케 도쿄의 집으로 도망가고, 또 그리워지면 와서 열정을 받다 떠나기를 몇 년간 반복한다.


한편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두 번째로 만나러 가는 열차에서 소설의 첫 장면이 시작되는데, 열차 안에서 창밖에 있는 역장에게 함께 일하고 있는 자신의 남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동행중인 병자를 신중히 간병하는 요코에게도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도쿄에 가정이 있으면서도 두 여자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것은, 그녀들이 모두 젊고 아름답다는 것도 있지만, 외현적으로는 냉소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척 하지만, 결국 그에게 ‘무조건적인 애정과 사랑, 헌신’을 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것을 받으면 자신도 돌려줘야 할 책임은 지기 싫으니 그냥 맛만 보고 떠나는, 그저 자기본위만 생각하는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성취들을 이루어보고,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과 사랑, 실망과 배신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인데, 부모로부터 받은 돈으로 무위도식하면서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보편적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복잡한 사연 속에서 진심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을 “헛수고”라고 폄하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진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동시에 그 대상이 되었을 때 짊어져야 할 책임은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부족함 없는 삶은 결국 자기본위가 정체성이 되기 쉽다. 어쩌면 가득 차거나 넘치는 것보단 조금 부족한 상태가 더 좋은 것 같다. 공백은 채워질 여지가 있으니까. 결국 우리 모두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이고, 삶에 절대적인 의미는 없으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채울 수 있는 모든 선택지가 이미 채워져 있으면 무엇으로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겠는가? 가만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고, 막상 가질 수 있을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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