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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Dec 13. 2019

피해자와 침묵

문제를 덮으면 모든 게 괜찮아지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나는 시간이 지나도 악몽과 공포에 시달렸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의 시도는 하지 않으면서 몇 달을 정서적인 암흑 속에서 기계처럼 일했다.

사건을 묻겠다고 나름의 이유를 갖고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내 그릇에 넘치는 괴로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묻어두기로 하더라도 어떻게든 감정 처리는 해야 했다.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마냥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 심리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심리적인 지지가 무엇보다도 절실하지만 피해자가 제대로 된 위로를 얻기는 어렵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한정 털어놓을 사람은 없어서 혼자 풀어내려고 많이 애를 썼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면서 얻는 심리 치유 효과는 한정된다. 심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게 피해자에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성폭력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미 정신적으로 지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가급적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잘못된 사회 통념 탓에 성폭력 피해 사실이 온전히 가해자의 잘못에 인한 피해로 인정되지 않기도 한다. 이 일을 털어놓는 피해자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모습을 보고서 마치 파놉티콘에 갇힌 느낌을 받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안다면 그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가해자를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렸을 때의 반응이 내 경험으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제3자의 태도는 둘로 나눌 수 있었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과 피해자를 비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고사하고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안심하게 되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다. 그 둘 가운데서도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높은 편이다. 피해자인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피해의 잘못을 나에게 돌렸다. 이야기에서 가해자는 마치 절벽이나 위험한 장소처럼 그 입장이 어디론가 증발하고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왜 반항하지 않았냐는 등의 피해자를 향한 비난을 수차례 들었다. 이들은 가해자 X를 모르고 나만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내 이야기에 나를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들의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반박할 논리도 떠오르지 않았고, 기력도 없어 이들의 말을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인간적인 신뢰에 대해서도 재고했다. 어쩌면 이들의 탓이 아니라 내가 아무런 힘이 없었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시의 나는 피해에 대한 괴로움,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 가해자를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공포, 사건이 계속 머리에서 반복되는 일 등이 모두 혼재되어 긍정적인 감정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감당하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범위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아는 사람으로 확장되었다. 공개 자체가 부담이었는데도 괴로움은 내가 스스로 파놉티콘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동료 E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E와 이야기할 때는 내가 일방적인 비난을 받지 않았다. E는 X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너를 좋아했던 것 같고, 이 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좋을 것이 없으니 어렵겠지만 잊어버리라고 했다. E는 X가 나에게 사과했어야하지만 어쨌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잘 지내는 것이라고도 했다. 가해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갑갑했지만 한편 내가 잘 지내야한다는 말이 무겁게 와닿아 이 말을 지표로 제법 오랫동안 견뎠다.

이후로 나는 조직 차원의 성범죄 처리 규정을 알아봤다. 내가 있던 직장은 직장 내 성적 괴롭힘에 대한 규정은 없었지만 품위 유지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피해를 받은 사람 때문에 가해자 X가 징계위에 회부되는 게 아니라 회사의 품위를 손상시킨 잘못을 묻는 것으로 회사에 끼친 손해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이는 조직 외부의 사람이 피해자일 경우에도 사내 규정으로 직원인 가해자의 징계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으나, 피해자가 조직 내에 있다면 그 피해자는 이로 인한 구제를 회사 차원에서는 받을 수 없다. 가해자 징계 규정은 있지만 피해자 구제에 관한 규정은 없다. 이를테면 피해자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해 회사 차원에서의 배려를 요구할 때 다른 직원이 가해자인 성범죄 피해는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단서를 따로 제출해야하고 그 원인이 사내의 다른 직원이라는 것은 회사 기준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정보가 아니다. 이렇게 병가를 내는 것만 가능한데, 이는 피해자 구제가 아닌, 질병에 대한 사내 조치 수준으로 완전히 다른 맥락이다.

성범죄와 관련해 조직 내에서 문제 제기를 했을 경우 처벌된 케이스가 반, 사실상 별다른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케이스가 반 정도 되었다. 그리고 처벌된 케이스조차도 사건 자체가 이유가 되기보다는, 회사 내부의 정치적인 맥락에서 사건을 명분삼아 처리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X는 회사에서 세력을 구축하지는 않았으나 딱히 정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해도 유야무야 넘어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리고 처리가 된다고 해도 내 일이 진짜 이유가 되지 못하고 실제로는 정치적 이유로 처리되는 것도 싫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의 피해자였던 직원은 사내 고위 간부가 가해자였다. 이 간부는 늦은 밤에 직원의 집 앞에 찾아가 전화한 사례였다. 해당 직원은 다른 직원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다른 직원은 곧바로 해당 간부에게 이 말을 전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간부는 바로 피해를 입은 직원을 불렀다는 이야기. 두 사람이 만나서 간부가 입막음을 했는지, 사과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피해자에게 위협적으로 들렸다. 사과하고 좋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고, 심지어 나 역시 사과를 받은 적이 있지만 어쩐지 그렇게 생각이 가지는 않았다. 이 직원은 해당 간부의 적대 조직 수장인 T로부터 문제 제기만 하면 그 후로는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결국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조직에 성범죄 척결에 앞장서고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의도는 없었다. 그들이 직장 내 성적 괴롭힘에 피해자 편을 들고 나선 케이스가 이 사례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몇 달 후, 다른 직원 한 명이 한 달여간 동료 직원으로부터 심각한 언어적 성희롱에 시달리던 케이스에서, 같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T의 워딩은 '별로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면서요?'였다. 정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조직에서 살아남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한 번은 워크숍에 참가했던 기자 한 명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앞선 사례들이 당시 사내에서 화제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던 끝에 그는 내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불안하지 않아요?” 이 질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럴 수도 있었고 공개 범위를 확장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지만 괴로움이 내 그릇을 넘치던 당시의 나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이미 사내 성폭력의 피해자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는 식으로 답했다. 워크숍 당시 발생했던 일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이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가해자가 누군지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일을 겪으면서 기자가 무섭다는 생각을 두 번 했는데, 그 중 첫 번째다. 그는 당시 워크숍 참석 인원을 한 명 한 명 추려내면서 가해자 X에게 접근해갔다. 사실 그가 그렇게 지목한 사람은 X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는데 엉뚱한 사람이 지목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없어서 나는 결국 X의 이름을 말하고 말았다. 그는 X가 예전 회식 당시에 했던 행동을 내게 알려주며 그렇게 의외는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T의 사례를 말했을 때는 그 사람은 원래 스킨십이 많다며 막아주는 모습이었다. 이때는 좀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접한 이야기들은 내 일이 알려지면 내가 받는 고통이 더욱 가중되리라는 예측을 하게 했다. 공론화에 대한 불안감은 단지 파놉티콘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피해자가 남기 어려운 회사 분위기상 내 경력이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 공론화를 내가 견디지 못하면 나는 여기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내 잘못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할 사람은 없었지만 유리 천장이 꽤 낮아진다는 것은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계속해서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만약 이 괴로운 기억 모음이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고도 그 후에 별다른 조치 없이 대충 넘어간다면 그 때는 정말 다시 서기 어려울 만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충 넘어간 사례에 대해서는 충분히 접했기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조용히 내 마음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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