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출한 첩이 전후 근 100명 금년에 들어서 열 번째 첩을 살기 싫단다고 불로 지졌다 희세색마의 전율할 범행
지난 15일 밤 10시 경에 경북 영일군 곡강면 흥안동 김모의 집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젊은 여자의 비명하는 애처로운 음향에 놀란 동리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전기 김모의 집으로 모여든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하였으나 문에는 밖으로 나무를 대고 못을 쳐 굳게 봉하고 방 안에서는 사람으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젊은 여성의 비명하는 신음과 남자의 노호로 일대 소동이 있었다는데 이제 그 내용을 탐문한 바에 의하면 집주인인 김모는 근대 희유의 축첩한으로 지금까지의 첩이 든 것을 통계하면 무려 100명에 달한다하며 금년에만도 벌써 10명째라는데 이 소동이 일어나기 5일 전에 김모는 김말년(22)이라는 여자를 첩으로 데려다 두었던 바, 5일동안 있다가 살지 않고 가겠다하므로 전기 김모는 자기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한다는 구실로 문을 밖으로 굳게 봉쇄하고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인두를 다뤄 전기 김말년의 국부를 함부로 지져 1개월 이상 치료할 중상을 냈다는데 피해자는 그날 밤으로 10리나 되는 흥해주제소까지 기어들어와 이 사실을 고발하였으므로 방금 경찰은 범인을 잡으려하는 중이며 피해자는 강본병원에서 치료중이라더라.
이 기사는 1929년 조선일보가 내보낸 기사다. 이 시기의 기사에는 바이라인이 없고 전체 기사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내가 이 기사에서 주목한 부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상을 언론이 다루는 방법이다. 피해자 김말년의 나이와 현재 위치는 상세히 공개된 데 반해 경찰이 잡아야하는 범인 김 모에 대해서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첩을 100명이나 두었고 이 사건의 가해자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기사를 보고 비분강개한 독자가 가해자 김 모를 잡아 경찰에 넘기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김 모와 수차례 스쳐지나간다고 해도 말이다. 김 모가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기사에 나온 이야기를 술술 읊어대지 않는 이상 김 모를 특정 지을 방법이 없다.
이 기사는 오래되었지만 보도 방식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군부대 내 구타사건으로 사망한 윤 일병 사건의 윤 일병은 피해자다. 인터넷을 이용해 윤 일병의 실명이나 신상 정보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가해자인 이 병장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나영이 사건은 가해자가 밝혀진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가명까지 붙여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지칭했다. 유명 연예인의 동생 한 명도 군부대 구타사건의 가해자였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예인과 혈연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반면 이 사건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다니던 학교와 학과, 이름 등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016년 3월 사망한 아동학대피해자의 본명을 사용하는데도 언론은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용의자나 범인이 어디 언급되기라도 하면 명예훼손이 무슨 벼슬인 것처럼 휘두르는데 반해,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아무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사법연수원 불륜 사건에 대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덧글을 달았던 한 사람은 불륜 남성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이 경우는 제3자였지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같은 말을 해도 역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 혹은 사실을 알리더라도 명예훼손은 가해자를 수렁에서 꺼내준다. 반면 피해자는 자신이 언론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예훼손으로 다룰 수 없다.
명예훼손은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킬만한 정보를 유포했을 때 적용되는 것으로 민사와 형사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이 문제는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이 개입해 수사하고, 형사 소송이 민사 소송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친다. 피해를 입은 것은 대개 피해자가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피해 사실을 퍼뜨리는 것은 인격을 손상시키는 행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자가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어도 이 일을 명예훼손으로 다루지 못한다. 피해자는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민사 소송으로 해결할 문제라 피해자 입장에서 부담이 더 크다.
대다수 언론사가 어뷰징으로 기사를 양산하는 현 체제에서 어느 언론사가 기사를 하나 올리면 그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피해자가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도 요구하려면 한두 언론사만 상대해서 될 일이 아니다. 통계적으로 다수의 언론사를 상대하는 가해자는 제법 있지만 다수의 언론사를 상대할 자금이나 강단을 갖춘 피해자는 거의 없다. 피해자가 용기를 냈다면 법원에 출석해 자신의 피해 사실은 물론, 언론이 자신에게 입힌 피해까지 수차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승소한들 상처뿐인 승리다. 정신적 피해보상에 대해 언론사가 피해자에게 지불할 금액도 적고 그렇다고 승소를 기점으로 이미 퍼질 대로 퍼져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피해자로서의 이미지를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언론사 입장에서는 가해자를 감추고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이슈화에 유리하다. 피해자는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수습하기에도 바쁘고 대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반면 가해자에게는 명예훼손이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다.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에 몇 차례 걸린 언론사는 아예 자기검열을 한다. 가해자의 신원을 보호하고 피해자 위주로 사건을 서술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면서 사람들은 피해 상황을 불가항력으로 인식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차마 저항하기 어려운 폭력에 노출된 상황을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가 사건을 불가항력으로 인식하면 사회는 책임감을 벗는다. 피해자가 어려서, 혹은 약해서 생긴 불가항력의 피해를 사회가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인식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가 너무 많아 가해자의 이름을 붙인 사건 가운데 김길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이후 언론이 가해자의 어린 시절이나 밝혀지지 않은 비화 등을 찾았고 그 안에서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심리적 원인이 있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가해자 위주의 프레임을 형성하면서 가해자를 불가항력을 발휘하는 괴물로 만들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없었던 일로 여기고 살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언론이 개입해서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 피해자의 감정, 가해자의 심리 대신 일반론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입장이나 생각을 보도함으로써 사건 당사자에게 2차 가해를 한다. 이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트래픽으로 수익을 얻는 언론사뿐이다.
2008년 사이버모욕죄가 법으로 제정될 때, 이 법을 가칭 최진실법이라고 불렀다. 배우 최진실의 자살에 악플이 영향을 미쳤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유족 측의 요청에 의해 정계가 최진실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이 고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런 일에 피해자가 쫓아다니며 요청을 해야하나. 언론이 트래픽이나 시청률, 열독률보다 공익적인 목적을 먼저 생각한다면 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사실 보도에서 어느 선까지가 공익적인 목적을 위한 보도인지는 논쟁할 여지가 있다. 범죄 유형을 알려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범죄 유형을 학습해 가해자가 되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대중으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현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기사는 절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