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를 취하하고 몇 달쯤 지난 어느 날 오전, 전화 벨소리에 깼다. 전화를 받았더니 어느 검찰청의 모 검사라면서 고소했던 사건에 대해 물을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을 치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소를 취하한지 이미 몇 달이 지났다. 비록 고소 당시 X가 나를 상대로 명예훼손과 무고를 걸겠다고 온 회사에 알렸고 고소 취하 후 굳이 내게 사과한 것을 열심히 취소하기는 했어도, 이 역시 내가 고소를 취하한지 몇 달이 지난 마당에 새삼스럽게 일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전화 건 사람에게 X가 내게 무고를 걸었냐고 물었더니, 가해자 측에서 무고를 건 것이 아니라 고소 취소된 사건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검찰 측에서 무고 여부를 판단하게 되어있고 피의자 X가 제출한 자료가 모호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X가 제출한 자료는 내가 사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보낸 메시지였다.
X는 내게 경찰 측에서 자료 제출할 것이 있냐고 물어서 있다고만 말하고 제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X가 경찰에 출석한 이후였으니 이미 제출했던 모양이다. 이는 나와 주고받은 메시지라고 했다. 내가 사과를 요구하려고 보냈던 것이고 내가 포함된 대화이기 때문에 나 역시 이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음은 물론 기록도 갖고 있었다. 그 내용이 X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내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 일을 풀고 용서하고 화해해보겠다고 했던 시도가 되돌아와서 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떳떳하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화해하려고 참고 참아가며 했던 노력이 무고했다는 단서처럼 작용한다는 데 화가 났다.
X가 내게 조사 진행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일로 다시 검찰에서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는 연락을 받고 검찰에 출석하기까지 거의 한 주간 내내 신경이 쓰였다. 겨우 조금 잊어가나 싶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한창 경찰 조사로 사건이 온통 들쑤셔질 때와는 달리 이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좌절감에 시달렸다. 실제로 출석하는 날 당일까지 조사받고 스트레스 받는 꿈에 시달렸다. 사내에서 어쩌다 뒷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소름이 끼치는데 나는 검찰에서 재진술할 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 X는 승진했다.
처음에는 X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연락이 왔을 때, X가 무고를 건 것이 아니라고 했다. X가 나를 고소한 것이 맞는다면, 검찰은 그 사실을 내게 무조건 고지해야 한다. X에게 아는 검사가 있을 수 있고 내게 압력을 넣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음모론적인 발상도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X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약점을 드러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로써 화풀이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 도움 될 것이 없어 그만두었다.
X가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보냈던 D와 G가 나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X는 어쩔 수 없이 경찰에 출석했는데, 당시 제출한 경위서에 내가 무고했다는 식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고소할 때 경찰에서 조서 작성과 진술 녹화만 했고 조서를 최종 확인했을 때도 제법 큰 폰트로 10여 페이지였다. X가 제출한 것을 대강 보니 내가 작성한 조서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경위서에 자료, 내 주장이 신빙성 없다며 반박한 내용 등등. 나처럼 그냥 경찰서에 가서 진술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치밀하게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몇 증인이 개입된 상황 탓에 그 정성에 비해 논리는 빈약했다.
X의 주장은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하도 어이가 없어 재미있을 정도지만, 당시에는 그 어이없음에 화가 났다. X는 내가 사건 직후에 고소하지 않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소를 제기했다는 것이 내 주장이 신빙성 없는 이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내가 사건 2주 후 X에게 사건을 처음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모두 사라졌고, 만나지 못했던 한 달 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고 했다며 마치 내가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허위 진술을 했다. 우선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사건 이후로 살아있다는 게 버거워 내가 그 사건 후로 얼마나 더 살아있는지,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기 때문에 2주를 한 달로 잘못 말했을 리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도 사건 날짜와 X에게 사건을 언급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증빙도 어렵지 않다.
고소 취하 이후 왜 굳이 역효과가 날만한 이야기들을 내게 하나 했는데, 검찰에 가보니 나와 마련한 자리에서 당시에 했던 말들이 X가 경찰 조사에서 했다는 말과 대부분 일치한다. 아마 내 앞에서 그 말을 함으로써 그 주장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더 공고히 하고자 그런 말들을 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검사가 내게 반박을 요구한 것들은 거의 그 내용이었다.
담당 검사와 조사 과정에서 말을 해보니 사회 경험이나 성범죄 사건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조사 중에 특별히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묻는 내용이나 말하는 것을 볼 때 시범 케이스로 피해자의 증언을 수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소가 되어 조사받는 상황도 유쾌할 리 없지만 이런 이유로 피해자를 불러 고소 취하된 사건에 대해 재진술을 시키니 나는 검사에게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모르던 것을 검사가 알려준 것도 있었는데, 성범죄 사건은 고소횟수가 늘어날수록 피해자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성범죄는 피해자가 13세 이하가 아니라면 고소기간이 있지만 무고는 고소기간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무고는 친고죄도 아니기 때문에 수사기관이든 가해자든 아무 때고 나를 고소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최초로 X와의 사건이 있던 그 순간부터, 그리고 내가 X를 고소함으로 인해서 또 다시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섰다. 내가 고소한 사건은 취하했기 때문에 공소권이 없고, 나는 언제든 무고에 걸릴 수 있음을 생각하면 이제 내가 훨씬 불리한 위치가 되었다. 검사는 담당 검사가 무고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무고를 걸기 어려울 것이라고는 했지만, 비슷한 말을 고소를 취하할 당시 담당 형사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검찰청 출입증을 목에 걸고 겨우 잊어가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고소 취소장에 X의 사과를 사유로 적었지만 이후 이 사과가 사실상 취소된 것은 어차피 고소 취소를 취소할 근거가 아니었다.
제출한 것들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었나 싶고 갑갑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최초의 사건보다도 그 후 X의 대처에 분노가 일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밖에 대처할 수 없었던 X의 인격이 안쓰럽다. 나는 이 시점에서 용서해야할지, 아니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야할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을지를 놓고 다시 고민했다. 사내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X는 내가 검찰까지 다녀온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리가 가깝다보니 회사에서 X와 마주치는 상황이 적지 않았는데 X도 내가 마냥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에서 표면적인 불이익은 없었지만, 이 일을 아는 몇몇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불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있다. 멀쩡히 지내다가 내가 개입된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 사람도 있었다.
X가 승진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나와 X의 말이 다르니 회사 측에서는 누구를 믿어야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내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판단했을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내가 처벌을 포기했는데, 굳이 회사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회사의 경우, 외부에 알려져 여론이 의식되는 사안일 경우에만 해임을 시켰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이하의 징계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대체적인 처리방식이었다. 회사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논리에서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라고 회사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때까지도 X가 진심으로 뉘우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일로 나는 1년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야 했다. 너무 지쳤고, 힘이 들었다. 어쨌든 나와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면, 고소 취하 이후에도 재차 수사기관에 불려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