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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Dec 22. 2019

기자들의 질문

검찰까지 다녀온 후에도 내가 겪은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겪은 일도 여전히 내 머리에 남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와 연관되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된 후에 나에게 이 문제를 넌지시 물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것이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뒤에서 미확인 정보를 돌리는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직접 입장을 물어주는 쪽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X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는데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한 번은 내가 사내의 누군가에게 피해자였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놀란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 판단이 틀린 적은 이 회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가해자를 특정 짓는 과정에서 마치 퀴즈를 풀고 과녁을 맞히려는 듯, 놀이거리를 찾은 양 즐거워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이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를 옹호하고 가해자를 공격하는 논리로 오랫동안 SNS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그 후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치를 접었고 어쩌다 그의 SNS를 볼 때면 비웃음이 나온다.

내가 피해자임을 말했던 사람 가운데 D와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이들에게도 나는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내가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는 가해자를 향해 엄청난 비난의 말을 쏟아내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내가 오버했다는 식의 말을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거나 전해 듣고 갑자기 변한 태도에 화만 났는데, 몇 년이 지나서야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나는 피해 사실을 이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X는 가해 내용을 다른 것으로 바꿔 말했기 때문에 만약 내 이야기를 들은 후 X 버전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들은 이런 의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뒤에서 의견을 돌리는 대신 나에게 물었으면 이보다는 나은 대답을 해줬을 텐데 나름대로 유능했던 이들이 취재를 마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회사에 돌린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하루는 사내 신문이 나왔다. 별 생각 없이 한 부를 집어 사무실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성추문과 관련한 바이라인 없는 기사가 있었다. 내용은 그즈음 있던 사건에서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가해자는 징계를 받았지만 징계 절차 당시의 태도를 보면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다. 그들의 이름이 적히지는 않았지만 회사 내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의 이야기였다. 가해자는 떵떵거리고 피해자는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런 문화를 혁파해야한다고 했다. 나는 이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간부급 기자들이 지난날 저지른 드러나지 않았던 성추문, 불과 며칠 전에 일으킨 성추문도 모두 파악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자중을 권한다. 진심이다.’ 무슨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정말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만약 아는 것이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도 되는지 등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문과 분노가 생겼다.

나는 기사 작성자의 생각이 매우 짧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피해자의 입장을 이렇게 잘 안다고 주장하면서 호수에 어떤 개구리가 있을 줄 알고 돌을 던지나 싶었다. 드러나지 않았던 성추문을 알고 있다면 그 사건의 피해자가 이 기사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피해자가 이 글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신문의 제작 담당자를 찾았다. 유관인물 중 하나가 J였다. 찾아가서 기사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 J는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이 기사가 밝혀지지 않은 성추문의 가해자를 공격하라고 쓴 것은 알겠지만 피해자가 이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삭제하거나 정정보도 조치를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J와 함께 관련 인물이었던 T와의 일을 수뇌부에게 폭로하겠다고 했다. J는 T와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나는 당시의 일을 모두 J에게 알렸다. J는 난감해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직후에 T로부터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자 J로부터 연락이 와서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물어 수락했다.

나와 헤어지자마자 J는 T에게 연락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미안하다면서 당시의 일을 인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해당 기사에 대한 조치를 원했지만 내가 T를 거론한 데서 내가 T의 사과를 받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T의 사과는 굳이 더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말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T를 언급한 것은 나는 기사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강하게 말하기 위해 내가 가진 카드 가운데 한 장을 J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J 자신도 그 기사를 보고 어린 사람이 기사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는 정도의 말을 들은 게 전부였고 사과도 J에게 받았다. J는 기사에 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언론 채널을 통해 내보낸 것이 아니어서 일을 키워서라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 그만두었다. 기사를 작성한 당사자에게 물었더니 호수에 돌을 던지려던 의도가 맞았다고 한다. 저렇게 쓰면 누군가 찔릴 사람이 있겠거니 하면서 쓴 기사란다. 몇 달 후에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만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짚을 생각을 못했다.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다. 얼마나 생각이 짧으면 언론인을 자처하면서 이런 기사를 낼 수 있는지.

회사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어느새 목적을 위해 정치적 수단을 찾는 냉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는 처음 입사했을 때처럼 ‘말 못하는 것이 많은 조직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조직’이라는 순진한 말을 기치로 삼아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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