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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우 Jun 29. 2024

현대의 아우라

아우라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아우라란 종교적 어원을 지닌 용어로 본래의 뜻은 '입김', '공기'를 의미하나 벤야민은 이를 철학적, 미학적 의미로 전환한다.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그 자신의 아우라로부터 생성된 권위를 보존하며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객관적 특성과 주관적 경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과거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다가가기엔 너무 먼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제의적 가치를 지닐 수 있었고, 아우라는 이러한 예술작품의 물질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즉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에 기인하여 예술작품이 진품으로서 '여기'와 '지금'에 맞물릴 때, 아우라가 깃든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아우라의 객관적 특성이다.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아우라는 심미적 경험의 한 종류이다.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인 아우라는 작품의 시공간적 거리감을 의미하며 여기서 수용자는 소외된다. 하지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경우 이러한 아우라는 쇠퇴(몰락)하게 된다. 어째서 그런가? 


기술복제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복제'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a.100). 하지만 기술적 복제는 다소 새로운 현상(a.101)인데, 이런 기술적 복제로 인해 앞서 기술했던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아우라의 특징들이 전환된다. 전통적 예술작품이 아우라의 근거로 지니고 있는 객관적 특성인 일회성과 유일성, 원본성은 기술 복제를 통한 재생산을 통해 극복되었다. 일회성은 반복성으로, 지속성은 일시성으로 전환되고 그로 인해 아우라의 특징들은 쇠퇴한다. 그리고 이런 변환으로 인해 예술작품은 더 이상 내게서 먼 것이 아닌 가깝고 친근한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벤야민은 이를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변환이라 설명한다. 이런 변환은 동시에 대중들로 하여금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이러한 아우라의 쇠퇴에 대한 생각을 두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벤야민이 관찰한 '아우라의 쇠퇴' 자체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전까지 예술은 숭고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는데 아우라의 쇠퇴를 겪으면서 대중들에게 친숙해진 현상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과거의 아우라'라 생각한다. 작금의 시대엔 '현대의 아우라'가 필요하다. 


어째서 새로운 아우라가 필요한 것인가? 이는 벤야민의 논의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스스로 '기술복제시대'라 정의한다(a.102)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당시 가장 진보한 복제 기술은 사진, 영화였고 그마저도 디지털 기술들에 비하면 제약이 많은 기술이다. 그렇기에 현재를 '디지털 복제 시대'라 칭해도 무리가 없다. 그리고 벤야민의 매체 미학의 핵심은 매체 기술이 사람들의 지각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기술은 그 자체로 영향력을 지니진 않는다. 기술이 있고, 생산물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생산물을 소비한다. 생산물은 그를 생산하는 기술의 특성을 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특성이 사람들의 지각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의 예시를 통해 묘사한다. 정신분산(a.144), 시각적 촉각성(a.145)와 같은 개념들은 이를 잘 정리한다. 그리고 이런 논의 자체는 현재에도 유효한데, 기술은 발전하였지만 벤야민의 논의 속 기술-매체-생산물-소비-지각의 도식 자체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선 설명에 따르면 아우라는 객관적 특성과 주관적 경험을 포괄한다. 여기서 기술은 복제 가능성을 넘어 가상 가능성(데이터)의 시대로 넘어간지 오래기 때문에 객관적 특성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묘사했던 정신분산, 시각적 촉각성과는 또다른 개념이 출현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이 주관적 경험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아우라'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개인적 경험 하나를 먼저 기술하고자 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시작하여 도시이론까지 확장하며 공부하는 동안 나는 엄청난 가속도로 발전하는 기술 시대에 사람들이 잃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직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왔다. 당장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기술 발전은 속도와 최적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을 보편성에 가깝게 만든다. 알고리즘이나 기타 다른 기술들이 개인에게 최적화된다고 설명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맞춤이다. 숏츠나 릴스와 같은 짧고 즉발적으로 소비되는 콘텐츠들을 생각해보라. 우리 시대가 짧은 생명의 생각들을 양산해내는 데에는 그들의 영향이 지대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공부를 하던 와중,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일전에 사진을 통해 경험했던 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임을 알게 된 이후였다.


나는 바다와 산이 함께 있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무가 울창한 산과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었던 넓은 바다는 기억에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이후, 그런 풍경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자주 흩어졌는데 종종 휴대폰 속 콘텐츠를 소비하며 마주하게 되는 산과 바다들에 강한 끌림을 느끼곤 했다. 그 콘텐츠의 주요한 대상이 산과 바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을 느낀 이후 콘텐츠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껴짐을 느꼈다. 바로 이런 경험이 바르트가 설명하는 푼크툼이었던 것이다. 


바르트는 푼크툼의 대상을 사진에 고정시켰다. 그가 설명하는 푼크툼은 '세부', 즉 부분적인 대상인데(b.52) 스투디움은 결국 언제나 기호화(code)되지만, 푼크툼은 그렇지 않다(b.60). 하나의 덧붙임(b.64) 혹은 막힌 시야를 제공(b.70)하는 등 푼크툼은 사진을 보다 개인에게 긴밀하게 만든다. 바르트에게 있어 스투디움이 호감이라면(b.36) 푼크툼은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푼크툼이 개인의 기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현대의 아우라'를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바르트가 푼크툼의 개념을 사진에 고정시킨 것과 달리 나는 그것을 시각 이미지 콘텐츠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읽었고, 그렇기 때문에 푼크툼을 '현대의 아우라' 개념으로 확장하여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내가 서로 다른 컨텐츠에서 고향의 산과 바다를 인지할 때 그것의 내용과는 별개로 컨텐츠들을 조금 더 긴밀한 대상으로 느꼈던 것처럼, 현대의 아우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과 연관하여 '지금, 여기' 내면에 구현시키는 특성을 지닌 대상들에 부여될 수 있고, 이것이 내가 생각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아우라다.



a.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b. <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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