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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즈 ciriz Oct 21. 2021

스타트업 개발팀에 입성하다

첫 이직과 전직의 시작(feat. TF)

내가 개발을 배우던 시절(그리 오래 전은 아님)은 온 세상이 개발자개발자하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개발을 그리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장벽 진입이 다소 높게 느껴지는 분야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디자인이 진짜 개발에서 구현 불가능한지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으로 시도했다가 재미가 붙어서 배우고 싶은 케이스였기에, 배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개발을 선택했다.


정보를 알아보다 보니 정부에서 지원하는 내일 배움 카드라는 제도가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 일정 비용을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제도였다. 이 카드로 등록할 수 있는 학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옛날 코드만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의 학원들이었다. 전형적인 정부 지원금으로 먹고사는 학원들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우연히 네이버 개발자 출신의 대표가 설립한 학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실무에서 진행하던 예제 위주의 실습이 많던 학원이었다. 이곳이라면 실무에서나 취업에서나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 등록했다. 실제로도 실질적인 예제로 수업을 진행하며 실무 노하우도 얻을 수 있었다.(만족도가 높았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폐업했다.) 


몇 달 간의 수업을 끝마치고 학원에서 연계해주는 회사들에 입사 지원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K사 자회사였고 이외에 개인적으로 로켓펀치를 통해 몇몇 스타트업에도 지원을 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가 과연 붙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코딩 테스트를 과제로 내주었고, 과제에 합격하고 K사 자회사 포함 몇 군데 면접을 봤다. 개발 지식을 물어보는 데 어찌나 떨리던지, 정말 이상한 답변들을 늘어놓고 집에서 이불킥을 날렸다. 다행히도 합격한 곳이 있었는데, 당시 떠오르던 뷰티업계 스타트업이었다. 

스타트업 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입사 당시 직원은 300명 수준이었고 개발자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테크팀 중 내가 속한 팀은 백엔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프런트엔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섞인 약 10명 정도의 팀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분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경력자였다. 인하우스에서는 신입을 뽑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개발팀으로 들어온 첫 직장부터 규모가 큰 조직이라 팀과의 일하는 법이나 기술 자체에서도 배울 것이 많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업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운영 위주의 쉬운 업무를 하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결제 개편을 위한 프런트를 담당하고 직접 백엔드 분들과 일하기도 했다. 

적응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니 여자들이 많던 에이전시 디자인 조직에서 일할 때와 남성들이 많은 인하우스 개발 조직에서 일할 때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작은 것 하나에도 까르르 웃고 서로의 사정도 어느 정도 아는 이전 회사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새로운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일 외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직무의 특성도 있다 보니 까만 IntelliJ와 Git, 서비스 화면만 보고 서로의 대화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삶이 조금은 어색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 회사에서는 프로젝트에서 더 좋은 퀄리티의 비주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참고용으로 Pinterest를 항상 보고 살았다. 아이디어나 소스가 될 수 있는 이미지들을 Pin 하고, 해당 사이트를 타고 들어가 이런 작업을 하는 곳은 어딘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까지 꿰고 또 시야를 넓혀가는 과정들이 많았다. 업무를 위해서는 Pinterest를 안 하고야 배길 수 없는 직장생활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퇴사를 하면서 다시는 이 알록달록한 Pinterest를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는데, 신기하게도 예전의 컬러풀한 그 화면들이 약간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이전 회사의 힘든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 반대의 팀에서도 힘들어한다니… 나 스스로가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조직 어디에서나 내 모든 욕구를 채울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퇴근 후 사이드 프로젝트라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런데 마침 회사에서 새로운 사업을 위한 TF의 팀원을 모집을 한다는 전사 메일이 도착했다.

[Experimental Space TF]
실험적인 공간 TF. 올해 여름 우리는 오프라인에 매장을 내려합니다. 실험적인 공간을 고민할 예정인데,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00일 자정까지 아래 구글 폼을 통해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를 보내주세요!


온라인에서 주 수익을 벌어들이는 스타트업이었는데 오프라인에 실험적인 매장을 낼 계획이고 그 매장을 위한 TF 원을 모집했다. TF 참가를 위해서는 직무도 나이도 아무 제한이 없었고, 단지 포트폴리오만을 요구했다. 이전 회사에서 공간에 대한 프로젝트 이력도 있었기에 제출해야 하는 포트폴리오도 어려울 건 없었다. 그래서 '옳다구나! 이걸 지원해봐야겠다' 하고 지원했다. 


얼마 후, 전 사원이 모인 타운홀 미팅 시간이었다. CEO는 메일로 보낸 것처럼 새로운 TF를 진행할 계획이고, 그동안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다며 ‘개발팀에서도’ TF지원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꽤 길게 했다. CEO는 아마 조직 내에서 이런저런 분야 가리지 않고 많은 지원자가 있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주변에 앉은 개발팀 분들은 ‘누구야... 일은 안 하고 누가 지원을 했어…’라는 말과 함께 분위기가 약간 술렁이긴 했다. CEO가 말하는 개발팀 지원자가 나인 걸 알기에 괜히 혼자 더 조용히 있었다. 괜한 팀 내의 반역자가 되긴 싫었다.


그 발표가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TF는 시작이 됐고, 관련 분야의 포트폴리오가 좋았다며 TF 구성원으로 뽑힐 수 있었다. TF팀은 당시 관련 업체 컨택을 하고 있던 총무팀 리더, 오프라인 매장을 담당하는 O2O(Online to Offline) 팀 리더, CEO, 온라인 MD 2명과 개발팀에서 온 나까지 총 6명으로 구성이 되었다.

TF는 매주 목요일 퇴근시간인 7시 혹은 살짝 앞당긴 6:30에 시작되었고, 한 번 시작하면 3-4시간은 지속되었다. TF팀의 과제는 매주 있었는데 때로는 새로운 매장을 위한 비주얼 컨셉 시안을 가져가기도 했고, 때로는 최근 오픈된 첫 번째 오프라인 자사 매장을 위한 개선점 아이디어를 가져기도 했다. 


나는 내 TF 업무로 인한 개발팀원 분들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팀에 피해를 더욱 끼치지 않으려 퇴근 이후의 시간과 주말을 충분히 활용했고 정규 근무시간에는 집중력 있게 더 성실하게 임했다. 어떨 때는 TF 업무를 위해 야근을 1시까지 하기도 하고, 집에서도 새벽 3-4시까지 몰두한 적도 종종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정말 재밌었다. 아이디어를 가져가기만 하면 CEO와 TF팀원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고, 타운홀 미팅 자리에서 내 아이디어가 몇 백명의 직원에게 공유가 되기도 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진 덕에 최근 1년 이내에 입사한 사람들은 CEO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는데, CEO와 소규모로 미팅을 하고 내 아이디어를 인정받는다는 것이 정말이지 짜릿했다. 


TF는 약 2달 남짓한 시간 동안 진행됐고, 7월의 어느 날 끝이 났다. TF 마무리 기념 마지막 회식 자리 도중 O2O리더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 우리 팀 오지 않을래요?”

띠용~ 이게 무슨 소리지?? 급작스러운 제안에 놀랐다. 그러자 리더는 이어 말했다.

“유진이 TF에서 냈던 아이디어들 너무 좋았고, 유진 같은 사람이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해요.  
O2O에서 브랜드 전략 포지션이고요. TF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아직 사업 세팅 단계라서 할 것들이 많고, 올해 내에 서울에 몇 군데 매장 더 낼 계획이고요.
곧 홍콩이랑 다른 국가에서도 매장 오픈할 생각이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떨렸다. 나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과 내가 어렸을 때부터 원하던 글로벌하게 일해볼 기회가 생기는 건가라는 생각에 기뻤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됐다. 

'내가 개발을 선택해서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ㅠㅠ 큰맘 먹고 직무 바꿔서 일하는데 다시 예전과 비슷한 일로 돌아가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또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c) unsplash


내게 남겨진 시간은 약 1주일. 나는 1주일 안에 제안에 대한 대답을 주기로 했다. 고민 포인트가 확실했기에 주변에 물어서 조언을 받기도 했고, 나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고민할수록 어렵기만 했다. 


그러다 옆에서 지켜보던 개발자 남자 친구가 말했다. 

“유진이 개발도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TF 일 할 때 눈빛이 개발할 때랑은 다르더라.
추가 업무인데도 새벽까지 재밌게 하고."


눈빛이 다르다고? 내가? 

일할 때 내 눈을 거울로 보면서 일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몰두해서 일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보기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전에 디자인을 하면서 개발을 배울 정도로 개발이 재밌긴 했지만, 개발자인 남자 친구처럼 주말에 큰 시간을 할애해서 개발 공부에 몰두할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그의 조언은 가까운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업계 동료로서 진심 어린 조언으로 느껴졌다. 


대학시절, 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선셋' 시리즈 보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주의로 살아왔다. 그 신념은 일과 사랑 그리고 삶의 모든 곳에 적용해왔었다. 이번 제안도 같은 기준으로 고민을 하게 됐다.

'이번에 이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진 않을까?'라는 자문에 내가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1살이라도 어릴 때 조금이라도 더 재미를 느끼는 일을 하자.


저 O2O팀으로 갈게요





<Me 노트>
- 나는 주도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진행하는 것이 재밌다.
- 나는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 나는 재밌어하는 일을 할 땐 몰두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다.
-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도전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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