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직무 경험과 스타트업 우먼 파티 스피커 w/ 김슬아, 윤자영 대표님
개발팀 분들과 작별인사도 마치고 업무 인수인계도 완료했다. 팀원들에게 작은 쪽지도 전달하며 마무리 인사를 완료한 시점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자리 이동을 하기로 했고, 금요일 사내 발령 공지가 떴다.
<8월 조직 발령>
부서 |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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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 전략 |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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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 세일즈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O2O(오프라인 매장 팀)의 브랜드 전략이라고 했는데 O2O리더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봤다.
“예전에 얘기할 때는 O2O만 맡기로 했었는데, 이번에 조직개편에서 O2O가 세일즈 밑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제가 세일즈 본부 전체를 맡게 됐어요. 그러면서 전략을 개별 팀으로 따로 빼서 세일즈 전략 팀이 됐어요”
나는 세일즈의 s자도 관심이 없고 해 볼 생각도 없던 직무였다. 조직개편의 맥락은 알겠지만 이건 반사기 아닌가라는 조금의 배신감이 앞섰다. ‘분명 오프라인 매장을 위한 전략팀이라고 했었는데, 세일즈 전략은 아예 다른 일이잖아. 다시 개발팀으로 간다고 하기엔 이미 작별인사를 크게 해 버려서 돌아갈 자신도 없고… 어쩌지 이거’
갑작스러운 발령에 당혹감은 숨길 수가 없었고, 아무리 전략이라고 한들 세일즈의 관심도 1도 모르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발령 후, 세일즈 전략팀을 만나게 됐다. 각자 플랫폼팀, 데이터팀 등 서로 다른 팀에서 업무 하다 이곳으로 제안받아 부서를 옮긴 분들이었다. 팀장님 한 분과 나까지 총 4명이었는데 우리의 공통점은 서로 제안받으며 예상했던 업무와 실제로 하게 된 업무가 각자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배신감(?)을 지닌 우리는 점점 친해졌고, 그렇게 세일즈 전략팀으로서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첫날부터 전략팀이라는 이름으로 세일즈의 중요 회의와 브랜드본부와의 연이은 회의가 이어졌다.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하던 TF와는 분명 달랐다. 이곳은 세일즈 부서였기 때문에, TF에서 계속 봐왔던 이미지 자료 같은 것들은 하나 없었다. 서비스 지표와 플랫폼, 드럭스토어, 면세점 등 각 세일즈 채널들의 숫자들과 각 분기 플랜 연간 플랜, 브랜드별 플랜으로 난무하는 자료들에 파묻힌 생활이었다.
덕분에 엑셀의 sum 이외에는 사용해본 적이 없던 조무래기에서 직장인의 반려 엑셀 기능 vlookup과 피봇 테이블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배신감은 커져만 갔다. ‘숫자만 보려고 직무를 바꾸면서까지 부서이동을 결심한 건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브랜드 본부와 세일즈 본부가 함께 참여하는 규모가 큰 미팅이 있었다.
그 미팅에서 결정과 진행을 담당하는 K(COO)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의 브랜드와 세일즈의 성장에 있어 필요한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편하게 저한테 얘기해주세요!”
안 그래도 브랜드 전략으로 일을 해보고 싶어서 부서를 옮긴 거였는데,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래서 K에게 직접적으로 슬랙 메시지를 보냈고, 미팅을 잡을 수 있었다.
K는 유명 전략 컨설팅펌 출신의 사람이었다. 펌에서도 전략 업무를 다수 진행했었다고 자주 말했고, 그 분야에서는 항상 자신감을 보였다. 나는 리더와 회사가 얻고 싶어 하는 매출 상승 방향과 내가 생각하는 방향 몇 가지를 제시했다. 그렇게 준비한 첫 덱은 약 80p분량의 제안서였다.
K는 제안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전략 출신의 인사였기에 유효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 이후 K는 우리 팀장님에게 내 리소스를 조금 가져가서 쓰겠다고 했고, 그렇게 매주 1번씩 아이디어를 보고하는 미팅을 진행했다. 미팅에서는 항상 내 아이디어가 인정받았고 종종 반영으로 이어져서 보람도 있고 현실화되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브랜드본부 실무자들의 날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처음엔 내 기분 탓인가 했는데, 몇 주가 지나도 비슷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K는 내가 보고하는 제안서의 아이디어들을 브랜드/세일즈 미팅에서 자주 이야기했으며, 때로는 덱 전체를 공유하기도 하며 실무 반영을 탑다운으로 지시했다고 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항상 덱 표지에는 이름을 넣었는데, 그 이름 때문에 의도치 않게 K의 디렉션 출처가 어디인지 담당자들이 알게 됐던 것이다.
내 의도가 어찌 됐건 조직에 그리고 다른 실무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K가 제안했다.
“유진, 어떤 일 하고 싶어요?”
나는 처음 부서 이동을 제안받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원래 하고 싶던 브랜딩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는 브랜딩이 하고 싶어요”
“그럼 유진에게 딱 맞는 일을 제안하고 싶어요. 우리가 PR TF를 할 건데 PR도 브랜딩이거든요. 유진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라면서 약 15년 차 이상의 PR전문가 분이 곧 오실 거라고 했다. 그 분과 함께 내 자리가 아닌 TF 전용 사무실(=사내 회의실 한 칸이라고 읽는다)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새로운 제안에 대해 신뢰하기도 어려웠고 또 새로운 업무 제안을 받았다는 자체로 지치기도 했지만 거부하기엔 어려웠다. 지금처럼 세일즈의 이름을 걸고 아이디어를 내서 해당 부서의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상황보다는 TF를 통해서 필요한 업무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PR TF에 참여하게 됐다.
PR전문가인 E선배는 연차답게 엄청난 전문가셨다. 젊은 나이부터 PR펌에서 VP로 지냈고, 싱가포르에서의 PR 경력까지 있으신 분이었다.
나는 E선배와 그 단칸방 같은 회의실에서 먹고 일했다. 개별적으로 위치한 곳이라 가끔 사무실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놀러 오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집주인처럼 그들을 반겨줬고, 브레인스토밍, 각자 업무, 회의 진행 같은 업무뿐 아니라 식사까지도 종종 그곳에서 했다.
둘 다 수다스러운 편이라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이디어가 불쑥 나오기도 하고, 업무적으로 여러 가르침 받으면서 배울 수 있었다.
어느 날, 사무실을 지나가던 컬처팀 직원분이 놀러 왔다.
유진, 이번에 진행하는 ‘스타트업 우먼 파티’ 패널로 참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스타트업 근무 여성들이 교류하는 자리인데요. 여성의 사회적 경쟁력 제고와 커리어 개발을 도모하는 그런 거예요. 그런데 D(CEO)가 남자분이셔서 여자분인 유진이 우리 회사 대표로 나가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문득 얼마 전 HR 리더와 티타임을 한 것이 생각났다. 그 티타임에서 이전 회사에서의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과 현재 회사에 입사해서 이미 여러 직무를 거친 나의 이야기를 어쩌다 자연스럽게 나누게 됐었다. 그랬는데 그 HR 리더가 나를 행사의 패널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스타트업 우먼 파티는 마켓컬리 김슬아 대표님, 스타일쉐어 윤자영 대표님, 그리고 나까지 총 3명의 스피커가 참가하는 행사였다.
'내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할만한 조합이었다.
행사 당일, E선배는 내게 말했다.
이런 거 한번 하면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던지, 다른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잘해봐~!
라며 내 입술을 진하게 그려주시곤 퇴근하셨다.
행사 날,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앞서 두 대표님들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랄까 자연스럽게 경험 이야기를 이어갔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수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유일한 스타트업 근로자 신분의 스피커였기에 업계에서의 현실적인 고민 질문들도 많이 받았고 최선의 답변도 했다. 스피킹 이후 스피커들 포함 남녀 가릴 것 없이 여러 사람들과의 네트워킹도 끝마쳤다. 주요 스타트업 대표님들과 스피커로 행사에 참여해본 경험만으로도 한 여름밤의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E선배가 말했던 좋은 기회도 없었고 골방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도 똑같았지만 괜스레 마음만은 가벼워졌다.
어느새, E선배의 TF팀 계약기간도 끝났다. TF도 끝났으니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동료 L과 함께 PR팀이 되었다. TF에 이어 PR팀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또 인사발령이 났다.
'또 인사발령이라니...'
회사 입장에서는 TF에서 외부 인사가 컨설팅해 준 업무들을 이어나가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같이 업무 하면서 배운 내가 적임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PR은 내가 원하던 일은 아니었다. 브랜딩이라는 이야기에 선택한 PR TF가 또 다른 팀으로 나를 인도하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었다.
나의 적은 경험과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회사에서 관리하는 체스판 말 중 하나구나라는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면서 조직 생활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기존에는 회사에 PR팀이 있던 게 아니라서 다른 업무를 하던 L도 인사발령을 받아 함께 PR팀으로 일하게 됐다. 나랑 같이 일하게 된 L은 사내 마당발일 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과도 대화하기 어렵지 않아 하는 타입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대면을 주로 요하는 업무는 쉽지 않았고, 대신 업무의 시작에 앞서 기초공사를 하고 빠트린 것들을 챙기는 업무 진행에 있어서는 자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며 좋은 팀이 되었다. 둘 다 PR 경력 하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기자들을 리스트업 해서 직접 미팅을 다니고 추가로 새로운 인턴을 뽑기도 했다.
정말 쉬운 게 하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가 점점 없어졌다는 것이다. 팀워크는 좋았지만 둘 다 전문성이 부족했고, 나는 이 업무가 하고 싶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긴 사연을 털어놓을 구석이 없었다.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기에 주위에 털어놓아봐도 답답한 마음만 쌓여갔다.
이쯤 되니 나는 이 회사에 개발팀으로 입사해서 오프라인 매장 브랜딩, 세일즈, PR까지. MD 이외에는 모든 업무를 해본 것 같았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한 회사에서만 여러 직무를 경험했고 그에 따른 좋은 면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목표로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는 모호했다.
이건 마치 바다에 떠다니는 길 잃은 배 같았다. 분명 저기 섬이 보여서 목표지점으로 삼고 왔는데 가까이 와보니 섬이 아니라 그냥 떠다니는 부표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저기가 섬이라고 해서 또 가보면 부표였다. 나는 섬만 생각하면서 왔는데 작은 부표라니... 그럼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인하우스를 처음 경험하면서 에이전시에서 진행하는 업무와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에이전시에서 브랜드 개편이나 특정 브랜드를 위해 제안해주는 브랜드 전략/디자인 업무와는 달리 인하우스에서는 브랜딩만을 위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업무의 성격은 조금 달랐다. 이런 사실은 알지도 못하니 그저 사내에서 이곳저곳 휩쓸려 다니기 쉬웠다.
한 회사에서 나름 다가오는 기회들을 잡았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과연 내 커리어라는 게 제대로 쌓이는 걸까? 나는 다른 회사에서 쓸모 있는 인간일까? 좋아하는 일이란 건 있는 걸까?’라는 불안감만 쌓여갔다.
고민에 휩싸이던 찰나 SBS 스페셜에 방송된 '은밀하게 과감하게 요즘 젊은것들의 사표'를 보게 되었다.
당시 ‘퇴사’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을 때였는데, 요즘 2030의 퇴사와 그 이면에 대한 방송이었다. 방송에서 퇴사학교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름부터 교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장수한 대표님까지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이후로 퇴사와 고민의 감정이 들 때면 퇴사학교에 기웃거렸다. 퇴사학교에서는 시그니처 강의로 ‘퇴사학 개론’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퇴사학 개론? 무슨 이름이 그래?'라는 궁금증으로 강의를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의 커리큘럼을 들여다보니 내가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은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마침 적절한 시기에 사무실 근처에서 열리는 강의 자리가 있었고, 구경만 하던 퇴사학교의 기초 수업 퇴사학 개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간 S전자에서 여러 팀에서 근무하며 조직 내 적성을 찾다가 계획 없이 1년을 쉬다 창업을 하게 된 장수한 대표님의 이야기와 함께 어떻게 퇴사를 계획할 수 있을지 배울 수 있었다.
강의를 들으러 온 많은 직장인들이 있었다. 나이들은 다양했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처음 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지애 같은 것까지 느꼈다. 수업을 들은 이후로 자연스럽게 퇴사에 대한 용기가 생겼다.
강의에서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직장과 병행하는 것을 추천했는데, 현재의 풀타임 직장보다는 프리랜서 업무를 하면서 새로운 무언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뭔지 아직은 모호했지만 나는 결정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Me 노트>
- 나는 조직생활에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더 주도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 나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열렬히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