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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경 Apr 11. 2023

풍경으로서의 골목길

재현 패러다임에서 표현 패러다임으로 '풍경'을 사유하는 방식 

김홍중은 ‘풍경‘이 사회학 연구 주제로 간과되어 왔다는 문제 의식 속에서 <마음의 사회학> '5장. 다니엘의 해석학'을 서술했다. 선험성, 제도성, 영상성이라는 틀로 풍경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5장 말미에 벤야민이 근대화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제시한 ‘아케이드’를 예시로 든 부분은 흥미롭다. 하지만 저자는 아케이드 그 자체가 ‘모더니티의 상징’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할 것을 강조한다. 유물론에 의거해 모든 것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인과성으로 설명하려는 열망은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단순히 아케이드 그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닌, 아케이드의 건축 재료로 사용된 철과 유리를 비롯해 백화점, 철도, 증권거래소, 문학양식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19세기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포착하고자 했다. 


“표현의 관점으로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p. 172)로서 다니엘의 해석학은 실패를 전제로 한 불완전한 사유로 이끈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미완성에 그쳤다는 점에서 실패한 프로젝트로 이해되는 것은 오해다. 김홍중은 풍경을 개념화하려는 시도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의미를 찾는다. “재현의 패러다임을 표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p. 168)한 것이야말로 벤야민이 이룬 공헌이다. “특정 풍경은 특정한 사유와 상상력을 유도하는 권능을 갖는다(p. 160)”는 김홍중의 지적은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지나쳐버렸을지 모를 우리 주변의 풍경을 다시금 재발견하도록 환기시킨다.


시인 정지용은 도시민의 시선에서 고향의 모습을 전원적으로 그려냈고, <여행의 기술>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휴가지에서 고흐의 그림 속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관찰하고 서술했다. 실개천이 흐르는 황금빛 논밭과 사이프러스 나무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포착한 일종의 풍경이었다. 본 글에서는 그러한 풍경으로 ‘골목길'을 주목하고자 한다. 골목길은 한국 근대화 시기에 아파트가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잡기 이전 진정성을 드러내는 풍경으로 서술할 수 있다. 눈이 오는 날에는 함께 마당을 쓸거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등 이웃 간의 정이 흐르는 장소,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등을 즐기며 함께 뛰어노는 코흘리개 아이들의 추억이 담긴 곳으로 묘사되는 곳이다. 삭막한 아파트 풍경과 대비되는 골목길을 살던 당시 도시민들의 정서는 ‘옆집 숫가락 갯수도 안다‘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아파트키즈인 나는 골목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각종 소설과 대중매체, 심지어 테마 시설과 전시장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은 ‘그때  그 시절’과 같은 상투적인 클리셰와 함께 유년 시절 정서가 담긴 추억의 풍경으로 제시된다. 도시 계획에 따라 설계된 일직선대로가 아닌, 실핏줄처럼 길과 길을 연결하는 골목길은 이웃과 나름의 규칙을 공유하는 장소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깐부편‘에서 연립주택과 골목길을 재현해 게임 참가자들이 생사를 건 경쟁구도를 잠시나마 잊고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세트장은 노을이 지는 해질녘, 골목길에 담장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특정한 시공간이 연상되도록 제작됐다. 이곳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으면 골목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새어 나오고,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엄마가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고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미술 감독 채경선은 월간 <디자인> 2022년 9월호 인터뷰에서 “오일남 할아버지(오영수 분)의 추억 속 조각들을 모아놓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구성하는 것이 콘셉트였다. 생존과 죽음, 양면성이 보이는 진실과 재현의 허구, 친구를 맺거나 소중한 이를 잃어야만 하는 정서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해서 더욱 많은 공을 들였다"고 언급한다. 또 연극 무대처럼 보이는 단면적인 세트장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붕과 대문의 형태를 활용했다고 덧붙였다. 연립주택에서 찾을 수 있는 박공 지붕과 녹색으로 페인팅된 알루미늄 철제 대문은 골목길의 정서적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연출 요소였던 것이다. 


tvN에서 인기를 끈  ’응답하라 1988‘은 쌍문동 골목길에서 자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려 공감을 자아냈다. 실제로 드라마가 히트를 치자 골목길 평상, 금은방, 연탄가게, 사진관 등을 재현한 의정부 세트장이 관광지로 활용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예산 문제로 드라마가 끝나자 철거됐다. 한편 잠실 롯데월드몰에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로 시간 여행을 콘셉트로 한 ‘서울 3080’이라는 테마형 길이 들어서 있다. 전차 모형과 간판 등을 재현한 이곳은 세련된 건물 외형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는 향수로 점철된 골목길의 실상이 다소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장소는 저자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진 현저동 골목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널빤지로 된 일각대문은 있으나마나하게 살림살이를 거리로 발랑 드러내고 있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까지 층층다리 양쪽 가장자리의 파인 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 비비고 지낼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지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 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 비켜선 층층대 위의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박완서가 묘사한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더럽고 무질서한 골목길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향수로 미화된 장소가 아닌 당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현실적인 모습일 것이다(물론 소설이기에 과장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골목길을 한국성, 더 엄밀히 말해 한국인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상으로 서술할 수 있을까?


지난해 V&A 뮤지엄에서 ‘Hallyu! The Korean Wave’ 전시가 오픈했을 때 그곳에 재현된 골목길 전시 디자인에 불편함을 표시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英 빅토리아 박물관에서 헤매는 '한류'> 에서 기자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박물관을 빠져 나왔다며, 한국계 외국인 큐레이터가 해당 전시를 총괄했기에 (영광스러운) 한국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음을 남는다. 골목길은 한국을 표상하는 이미지라는 특권적 지위에서 내려와 부끄러운 과거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골목길의 스타일을 뉴트로 붐의 연장선상에서 디자인적 요소로 활용하는 데 그쳐야 하는가? 혹은 골목길에서 진정성이라는 역사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는가? 김홍중이 말한 '풍경의 사유'를 골목길에 대입해볼 때 이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본 글은 김홍중의 <마음의 심리학> '5장. 다니엘의 해석학'을 참고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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