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의 제잘제잘
제잘제잘은 '제대로 잘 만든 말을 제대로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뉴스레터입니다. 간판, 광고, 책, 영화는 물론 전단지, 밈, 명언 등 일상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이 건드린 감정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광고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말 많은 시대에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문장을 전합니다.
김도훈 작가의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오피스텔은 떠날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모든 것이 옵션이고 붙박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도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참 맞는 말이다, 싶어서요.
스무 살에 처음 서울에 올라와 지금까지 여섯 번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엔 학교 앞 5평 남짓한 원룸에서 살았고, 나중엔 서울로 올라온 동생과 잠실 1.5룸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어요. 그 동네에서 몇 번을 더 옮겨 다녔고 동생이 먼저 결혼을 하면서 저는 미사에 있는 8평짜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갔죠.
그때 오피스텔을 선택한 건 새로 가전을 사지 않아도 되는 부담 덜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곧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빌트인 제품들이 갖춰져 있는 곳에 살아도 괜찮겠다 싶었죠. 오피스텔처럼 모든 게 갖춰진 집에서도 마음 한구석은 늘 떠날 채비 중이었달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를 만큼 허무하게도 아무런 성과(?) 없이 4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 처음으로 내 집이라는 걸 마련해서 살고 있습니다. 더는 전세로 불안정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겼고, 지방에 계시던 부모님이 양평으로 올라오시면서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거든요. 빌라에 살 때도, 오피스텔에 살 때도 분명 잘 살았던 것 같은데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 듭니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오면 우두커니 서 있는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동네가 동네인지라 밤하늘에 잔뜩 별이 뿌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걷다 보면 확실히 깨닫죠. 이곳은 금방 떠나지 않을, 나의 안식처가 되겠구나.
돌아보면 저에게 집이란, 무엇보다 편한 곳이어야 했습니다. 밖에서는 늘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다 보니 적어도 집에서는 온전히 풀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공간. 방해받을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없이 그냥 나로 있어도 되는 곳. 그래서 집은 저에게 가족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받아들여줄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문득 ‘이글루’를 떠올렸습니다. 얼음으로 지었지만 따뜻한 집. 그 모순적인 감정이 그때의 저와 참 많이 닮아 있었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겨레 문화센터를 다닐 때 짧은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소설을 읽은 후 다 같이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제목이 이글루임에도 불구하고 '글이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죠.
고등학생 때 썼던 시 중에 <기다리는 등불>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요. 그 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언젠가 돌아올 너의 집인 것처럼
저는 그때도, 지금도 집을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혹은 언젠가의 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등불 같은 곳. 집이라는 건 결국, 우리가 어디에 머무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비추는 불빛 같은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 불빛은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도 지금 따뜻함이 비추고 있기를.
[오늘의 문장]
“오피스텔은 떠날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모든 것이 옵션이고 붙박이다.”
— 김도훈,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오늘의 질문]
1. 당신에게 집은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는 곳인가요?
2. 지금 있는 그 집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인가요?
3. 당신은 언제, 어떤 순간에 ‘집’이 그리워지나요?
[오늘의 추천]
https://www.youtube.com/watch?v=60mtTIo9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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