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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 형용사 빼고 명사와 목적어로만"

5월 23일의 제잘제잘

by coldred

제잘제잘은 '제대로 잘 만든 말을 제대로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뉴스레터입니다. 간판, 광고, 책, 영화는 물론 전단지, 밈, 명언 등 일상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이 건드린 감정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광고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말 많은 시대에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문장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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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몇 편 있었습니다. 광끼, 트리플, 9회 말 2 아웃, 광고천재 이태백, 키스 식스센스... 제목만 봐도 아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연애 이야기에 집중하거나 업계를 겉핥기식으로만 다뤘죠. 의학 드라마를 보며 의사들이, 법정 드라마를 보며 변호사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저도 몇 번은 실소를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래서 ‘대행사’라는 드라마가 반가웠습니다. 제목부터 ‘대행사’라는 단어를 쓰다니요. 이 업계는 여전히 3D 업종이라고 불리며 점점 더 기피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광고를 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밤낮이 바뀌고 주말이 없고 퇴근도 없는 일이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이 드라마를 보고 다시 이 업계를 꿈꾸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제로 1999년 광끼 방영 이후 광고홍보학과의 인기가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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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사는 고아인이라는 CD, 즉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메시지부터 비주얼까지 캠페인의 크리에이티브를 총괄하는 자리이자, 광고 제작의 모든 것을 리드하는 역할입니다. 제일기획 부사장이었던 최인아 대표를 모티브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이 드라마 속에는 당연히도 인상 깊은 대사들이 많았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 나아간다.
사자가 자세를 바꾸면 밀림이 긴장한다.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


그리고 고아인이 CD가 되기 전, 신입 카피라이터였을 때의 에피소드도 인상 깊었습니다. 선배의 피드백에 울다가 밤새 수십 장의 카피를 써왔던 장면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될 때까지 쓴다, 그게 이 일이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JcN-LvlYb6I


얼마 전 신입 카피라이터 면접을 봤습니다. 포트폴리오에 있던 카피 습작에 대해 물었습니다. 성분이 좋기로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의 기존 카피가 재미없다고 느껴 바꿨다며 보여준 문장은 이랬습니다.


민낯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착안한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과연 ‘창의적’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굳이 윤동주 시인의 시여야 했던 이유는 뭘까요? 그래서 계속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같았습니다. 지원자는 기존 카피는 별로였고, 자신은 더 크리에이티브한 방향을 제안했다구요. 한 단락이 넘는 대답 속에는 형용사, 부사가 지나치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이력서에 있는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습니다. 유명 CD의 강의를 들었다고 적혀 있길래 인상 깊었던 내용을 물었죠. 그는 '카피가 막힐 땐 이렇게 풀어보라'는 팁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대학생 때 다녔던 토익 학원이 떠올랐습니다. 문법보다 빠르게 푸는 기술을 가르쳐주던 학원이요. 단기간 성과에는 효과적이지만, 본질은 아니었죠.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이력서에 적힌 또 다른 한 줄에서 시작됐습니다. '같이 일하고 싶은 CD, 커리어 목표는 CD입니다.'


어떻게 하면 CD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CD가 되고 싶으신가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장황했고, 결국은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자리'라는 말로 마무리됐습니다.


카피라이팅은 글 솜씨보다도 전략과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모든 수식어를 제외하고 남은 키워드로 승부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이 일은 기술이나 정답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정해진 공식을 따르는 순간부터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는 나만의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죠. 그 시작이 바로 “어떤 CD가 되고 싶은가요?” 같은 질문입니다. 정답 대신 생각을, 문장 대신 방향을 말할 수 있다면 이미 반은 도착한 셈입니다.


다행히도 드라마 <대행사>는 성공했습니다. 최고 시청률 16%. 광고라는 일이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며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요즘은 많이 지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바랍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광고인을 꿈꾸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늘어나기를. 그리고 언젠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 더 많은 분들과 동료로 만나 뵐 수 있기를요.


<오늘의 문장>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 나아간다.

– 드라마 <대행사>


<오늘의 질문>

1. 드라마 한 편이 당신의 선택을 바꿔놓은 적이 있나요?

2. 만약 광고인이라면 당신이 되고 싶은 CD는 어떤 사람인가요?

3. 면접장에서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문장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추천]

https://www.youtube.com/watch?v=QW-sw_SgQ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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