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의 제잘제잘
제잘제잘은 '제대로 잘 만든 말을 제대로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뉴스레터입니다. 간판, 광고, 책, 영화는 물론 전단지, 밈, 명언 등 일상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이 건드린 감정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광고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말 많은 시대에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문장을 전합니다.
"돌아보면 불안을 성취로 만회했던 거죠. 노력해 얻은 결과물로 ‘난 필요한 존재’라는 욕구를 채운 거예요."
얼마 전 롱블랙에서 서울대 정신과 교수 인터뷰를 봤습니다. 자신을 ‘불안을 성실함으로 극복하는 아이’라고 말하던데,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늘 최선을 다했고, 다행히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죠. 그래서 점점 더 성실함과 책임감에 집착하게 됐습니다. 쉬는 법을 몰랐고 '워커홀릭'이라는 말도 자랑처럼 들렸으니까요.
17년 동안 번아웃은 가끔 있었지만 그런데로 견딜만 했죠. 하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하루 2~3시간 자며 버티다 결국 퇴사했고, ‘그냥 카피라이터’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이직했죠. 처음엔 선임 카피로 입사했지만 결국은 그룹장까지 올라갔지만 말이에요.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니가 CD를 안 해봤으면 모를까, 이미 눈에 다 보이고 다 아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너 안될걸?"
친구 말이 맞았어요. 가만히 못 있겠더라구요. 팀의 문제와 제가 할 일이 너무 선명했거든요. 그렇게 또 3년 반을 달렸고, 결국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엔가 잠실광역환승센터에 내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탁 트인 광장 앞에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옥죄이는 기분.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해서 식은땀도 흘렸습니다. 오로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닥만 보면서 허겁지겁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던 기억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그때 다니던 회사가 강남역이라 똑같은 경험을 몇 번 해야 했죠.
"우리는 바쁘게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라 인식합니다. 누군가 1년 여행을 간다고 하면, 부럽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한가하다고 생각해요. 또 이직할 때 6개월의 공백이 생기면 그동안 뭘 했는지 포장해야 하잖아요? ‘그저 쉬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거죠."
숨 막히는 지하철역,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 병원을 2년 다닌 끝에 다시 퇴사했습니다. 지금은 반은 프리랜서처럼 반은 백수처럼 지냅니다. 가뭄에 콩 나듯 생기는 면접 때는 ‘왜 작년 11월에 그만뒀는지’ 설명하고 있구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는 숨도 잘 쉬고, 잠도 잘 자거든요.
덕분에 3월엔 제주 유채꽃도 보고, 뉴스레터도 시작하고, 글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프리랜서 일은 이번 달까지만 하기로 했어요. “지금 아니면 언제 쉬어보겠어?”라는 마음으로 혼자 싱가포르 여행도 결심했습니다. 몇 년째 혼자 여행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드디어 가네요. 쫄보인 데다가 영어를 못 해서 세미 패키지로 선택했지만 말이에요. 무섭지만 자유일정인 하루쯤은 편안하게 다녀볼 생각입니다.
병원을 다니던 2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책하기 바빴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작게라도 뭔가 해보려는 저 자신이 조금은 기특합니다. 일이 곧 나였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저를 위한 삶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금 잘 쉬고 있나요? 쉼을 회복이 아닌 충전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의 문장>
마음은 원래 방황이 기본값이니, 집중이 흐트러지거나 걱정이 떠올라도 괜찮다
– 김은영 서울대 정신과 의사&교수, 롱블랙 <휴식에 관하여 : 쉴 때도 일 생각하시나요, 마음 주치의가 알려주는 휴식법 중에서>
<오늘의 질문>
1. 지금의 나는, '쉬고 있는 중'인가요, '멈춰 있는 중'인가요?
2. 쉬는 시간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3. 일이 아닌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추천>
황성혜 <나는 왜 일을 하는가 : 글로벌 헬스케어 회사에서 보낸 17년, 그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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