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의 제잘제잘
제잘제잘은 '제대로 잘 만든 말을 제대로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뉴스레터입니다. 간판, 광고, 책, 영화는 물론 전단지, 밈, 명언 등 일상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이 건드린 감정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광고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말 많은 시대에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문장을 전합니다.
18년째 같은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애정만으로 채워졌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애정과 증오, 두 감정 사이를 수없이 오갔으니까요. 1~2년 차 때 선배들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 일은 마약 같아. 한 번 빠지면 못 나와.”
그땐 농담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사람에 치이고 갑질에 흔들리고 일에 파묻혀도, 내가 쓴 카피 한 줄, 아이디어 하나가 빛을 보면 그 순간만큼은 온몸이 쩌릿할 정도의 희열을 느낍니다. 정신없이 휘둘리다가도 다시 그 맛을 찾아 들어가게 되죠.
시간이 지나면 그 ‘약발’도 점점 약해집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며 세상에 무뎌지듯, 저 역시 점점 감정의 진폭이 줄어들더군요. 대신 남는 건, 묵직한 피로감과 오래된 통증. 새벽 퇴근 후 침대에 누웠을 때,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었던 순간도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도 과로로 쓰러지거나 건강 때문에 그만둔 이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건강이 크게 나빠져서 퇴사를 한 경우죠.
얼마 전 우연히 본 기사엔 월스트리트에서 연봉 2억을 받고도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수치만 보면 꿈같은 삶이지만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며 삶을 잃어가는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더군요. 연봉 2억이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것 같지만 어쩌면 그만큼 할 수 없는 일도 많아지는 건 아닐까요. 마음대로 울 수도 병원에 오래 누워 있을 수도, “좀 쉬고 싶다”고 말할 자유조차 사라지는.
무언가를 깊이 좋아한다는 건, 이따금 찾아오는 아픔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 이승용, 『헛소리의 품격』
재작년에 읽은 책 <헛소리의 품격>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제일기획의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라 그런지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죠. 꼭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을 다시금 떠올리며 동시에 6~7년 전에 봤던 면접이 생각납니다.
합격하지 못할 걸 알았는지 지원자는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거의 인생 상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덜컥 저에게 물었죠.
"혹시, 이 일을 해서 행복하신가요?"
다른 곳도 면접을 봤는데 그곳의 선배들이 이 일은 힘드니까 하지 말라며 말렸다고 해요. 자신은 이 일을 너무 하고 싶은데,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말리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겠죠. 질문을 받은 저는 당황했습니다. 행복? 이 일을 하면서 애정과 증오에 대해서만 생각해 봤지 행복이라는 낯선 단어는 떠올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행복, 행복이라뇨.
질문을 듣고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제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였습니다. 애정과 증오의 크기가 등호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51대 49 정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면접 봤던 그 친구 이 업계에 발을 들였을까요? 만약 시작했다면 행복하게 일하고 있을까요?
그날 이후로도 여러 번, 다른 형태의 비슷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일이 좋아요?"
그럴 때마다 제 대답은 늘 조금씩 달라졌지만, 결국엔 비슷한 곳에 도달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어쩌면 이 일은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나를 불러내는 쪽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한다는 건 그렇게 쉽게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요. 여러분의 일은, 어떠신가요? 애정인가요? 증오인가요? 아니면 애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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