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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다르게 살자."

4월 25일의 제잘제잘

by coldred

제잘제잘은 '제대로 잘 만든 말을 제대로 잘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뉴스레터입니다. 간판, 광고, 책, 영화는 물론 전단지, 밈, 명언 등 일상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문장을 수집하고 그 문장이 건드린 감정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광고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말 많은 시대에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문장을 전합니다.


"다시 살아보는 게 가능할까?"


클리셰 범벅인 영화가 좋을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그럴 땐 오히려 전개가 뻔한 영화가 더 편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짱구나 아따맘마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기도 하고,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 액션 영화를 틀어놓기도 합니다. 익숙하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그냥 웃고, 아무 생각 없이 한숨 돌릴 수 있거든요.

며칠 전엔 라스트 홀리데이를 봤습니다. 2006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CG도 어설프고 전개도 예측 가능하지만,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을 멈추게 하는 대사를 던지죠. 주인공 조지아가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다음엔 다르게 살자. 좀 더 웃고, 좀 더 사랑하는 거야. 겁내지 말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을 초기값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잘못한 일, 후회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었던 장면들. 그 모든 걸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한 그루의 나무라면, 씨앗으로 돌아가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자라고 싶다는 마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알지만, 가끔은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조지아가 만들었던 책.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던 그 책은 가능성의 책에서 현실의 책으로 바뀌는 순간을 보여주었죠.

그 장면이 유독 오래 남았던 건, 그 책이 단지 영화 속 소품이 아니라 조지아가 스스로를 믿고 삶을 바꾸려 했던 ‘작은 선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가능성의 책’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연말연초가 되면 유튜버들이 만드는 비전보드 영상을 본 적 있습니다. 한 해 이루고 싶은 모습을 미리 그려보는 거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비전보드라니, 저런 게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만들고 있더라고요. 퇴사를 하고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유로움에 괜히 불안하던 때였습니다. 경제, 여행, 창작, 건강, 독서 같은 키워드로 두 장의 비전보드를 만들었고, 현관문과 냉장고에 붙였어요. 입시 때 대학을 약간 상향 지원하듯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도 넣어봤죠.


그런데 의외로, 어쩌다 보니 시도하게 된 것도 있고 작게나마 이뤄낸 것도 생겼습니다. 아직 4월 말인데 말이에요. 이러다 12월 말이 되면 정말 다 이뤄내는 건 아닐까— 약간은 두렵(?)기도 합니다. 저도 조지아처럼, 가능성의 책을 현실의 책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큰일이 생겨야만,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걸까? 꼭 한계까지 가야만, 더 많이 웃고 더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그런 다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리셋 버튼은 없지만, 우리에겐 새로운 챕터를 여는 선택권은 있는 것 같아요.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는 건 가능한 일이니까요. 무언가를 완전히 잊는 것도, 다 지우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전보다 조금 더 나를 챙기고, 조금 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정돈해 보려는 시도. 그 시도를 할 수 있는 타이밍이 꼭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어느 날 문득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어느 날 아침 문득 바람이 좋아서, 혹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이 당신의 Phase2가 시작되는 순간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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