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스>의 명대사
너무너무 예쁘다.
처음 본 스노글로브(Snowglobe)는 눈이 부시게 빛났다. 세상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게 있을까? 투명한 액체로 채워진 유리구슬 안에는 작디작은 마을이 있었다. 스노글로브를 흔들면 바닥에 있던 입자들이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대로 스노글로브를 내려놓으면 마을 전체에 눈이 내린다. 이 세상 안에서는 어떤 마을이던 눈이 오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몬트리올을 다녀온 친구의 선물인 스노글로브가 보인다. 유리돔 안에는 몬트리올을 상징하는 성당이 있으며 뒤집은 다음 내려놓으면 돔 안의 눈 조각들이 영롱하게 떨어진다. 또 아래쪽에는 몬트리올을 상징하는 타워와 빌딩들이 새겨져 여행한 이에게는 소중한 추억을 남기고 선물 받는 이에게는 꼭 한번 가고 싶다는 소원을 담는다.
이 스노글로브는 저녁에 자기 전 불을 끄고 보면 더 진가를 발휘한다. 불을 끄면 그동안 머금고 있던 형광색이 눈부시게 빛나며 눈 내리는 풍경의 그곳으로 나를 금세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한참을 바라봐도 지겹지가 않다. 오히려 더 눈이 천천히 내리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몬트리올의 대성당 앞에서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행복하게 여행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황홀경이라는 단어를 쓰면 딱 들어맞을까? 눈 내리는 몬트리올은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의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감동을 자아낸다.
어느 날 퇴근 후 피곤한 저녁, 미세먼지에 눈이 따가워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허나 그동안 아름답기만 했던 스노글로브의 야광에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눈도 따끔하고 피곤이 몰려와 잠에 들고 싶은데 영롱하기만 했던 스노글로브의 빛이 이제는 잠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피곤한데 형광색이기에 더욱더 눈을 부시게 해 잠을 못 자겠네.' 짜증이 밀려와 스노글로브를 안 보이게 책상 서랍 안에 넣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눈 내리는 스노볼을 감상하느라 밤잠을 못 이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눈에 거슬려 밤잠을 못 이루게 되다니. 내 맘이 이렇게나 쉽게 변하는 것일까?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계속 스케치를 하거나 사장이 불러도 전화를 붙잡고만 있는다. 하나뿐인 딸의 졸업식날 일정을 논의하는 대화뿐만 아니라 어느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사장은 이런 주인공 그레그가 그저 못마땅하기만 하다. 정신 못 차리는 그를 불러 사직을 권고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레그는 사장을 밀치게 된다. 사장은 뒤로 고꾸라져 책상에 머리를 박고 순식간에 죽게 된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라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모르던 그는 사장의 시체를 커튼 뒤에 숨기고 길 건너 술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이자벨.
이 세상은 진짜가 아니고 자신들이 진짜라고 이야기하는 그녀. 범행을 저질러 정신이 없는 그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그녀는 순간을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마법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죽은 사장을 창문에서 떨어뜨리고 난 후 자살로 위장한 것이다. 되돌려보면 그레그가 시체를 세워뒀을 때 창문이 열리는 곳이었고 바람이 부는 동시에 창문이 열려 떨어진 것이다. 이자벨은 노란색 약을 활용해서 신기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제 약으로 염력을 가진 그레그는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새로운 세상은 꿈결만 같다. 이전 세상과는 달리 숨 쉬는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진다. 그곳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인다. 이러한 세상은 그레그가 꿈꾸며 그려온 그림 속의 세상인 것이다. 이자벨은 자신이 만든 이전 세상이 '어글리'한 세상이고, 그레그 박사가 그린 새로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 주장한다. 신세계에 푹 빠진 그레그는 이전 어글리 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구가 끝나지 않았고 청색 물질의 일부만 흡입했기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세상에서 행복을 즐기려 한다.
이자벨의 연구 발표날 파티에서 그레그는 멀리 서 있는 딸을 만나게 된다. 딸이 있는 곳으로 향하니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그녀가 가진 노란 약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자벨은 '어글리'로 돌아가 파란 약을 정량 다시 흡입해야 한다고 그레그를 데려가지만 양이 충분치 않다. 선택의 기로에서 이자벨은 파란 약을 사용하고 그레그는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죽은 직장 상사는 이곳에서 죽지 않은 곤란한 상황이 되고, 시뮬레이션은 리셋된다.
It's amazing how easy humans can get used to even something spectacular. (인간은 놀라운 어떤 것도 곧 익숙해지는 게 놀라울 뿐이지.)
- 영화 <블리스> 중
놀라운 세상이 왔다. 스마트폰, 스마트웨어 등 우리 생활을 유용하게 하는 수많은 제품이 나왔다. 이 제품들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와우! 라 외칠 만큼 입이 떡 벌어져서 새롭고 편해진 세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화기가 아닌 네모난 스마트폰을 들고 어떻게 전화를 받아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커다란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작은 스마트폰과 손가락이면 어디서든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작은 기계가 전 세계를 흔들어놨다.
허나 이 작은 기계도 이제 놀랍지 않다. 누구나가 가지고 다니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목에 걸고 다니는 이 제품은 우리가 일상 속의 필수품이지 놀라운 제품은 아닌 것이다. 경이롭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이제는 놀라운 게 별로 없다. 영어 표현으로 'been there, done that'로 '가봤고 해 봤어.(그래서 놀라울 게 없어.)'라고 일상의 무료함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살지 못했던 놀라운 세상이 올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바뀐 재택근무, 언택트 세상에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새로운 놀라운 제품과 서비스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익숙해질 것이다. 더없는 행복이란 덧없는 행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세상은 점점 진화하고 있고 우리는 새로운 어떠한 것이 와도 놀라고 또 금세 잦아들 것이다.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맛이 그다지 더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먹으면서 '맛있다'라고 외쳐야 그 음식의 맛과 추억은 오래가는 것이다. 이제 덧없는 행복을 더없는 행복으로 만들기 위해 행복을 더하기로 했다. 맛있다, 즐겁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표현하며 주변을 스노볼처럼 밝혀 영롱하게 밝히는 것이다. 더한 행복은 아마 우리의 마음과 입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