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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정처 없이 걷다가 그리스의 꽃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아는 이름이라곤 부겐빌레아와 샐비어뿐.


부겐빌레아의 존재는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며 눈에 들기 시작했다. 씨엠립의 어느 사원에서 무성히 피어난 꽃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부르고 싶은 마음에 '종이꽃'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후, 만지고 있으면 싱싱한 종이 같은 그 꽃을 아는 이를 부르 듯 부르며 좋아했다. 종이꽃의 이름이 부겐빌레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임경선의 산문집 『다정한 구원』을 통해서였다. 책은 그가 딸과 함께 한 포르투갈 여행을 담았다. 겨울의 포르투갈만 아는 나는 여름의 포르투갈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겐빌레아가 만발한 포르투갈의 여름을 상상하니, 그곳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부겐빌레아의 선명한 분홍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맑고 파란 하늘이 그곳에도 있으리라는 확신. 저자 임경선은 그 부겐빌레아를 사랑한다. 종이꽃이라 부르긴 했지만, 동일한 대상을 두고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한다던 김장우가 생각났다. 나는 이 꽃을 더 이상 종이꽃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부겐빌레아. 부겐빌레아. 이 꽃의 이름은 부겐빌레아다.


샐비어를 나는 사루비아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사랑의 천사 웨딩피치》가 한 몫한 결과이다. 다른 세 명의 마법소녀와 달리 시간 차를 두고 존재를 드러낸 네 번째 마법소녀인 사루비아는 붉은 머리와 보랏빛의 보석 같은 눈을 지녔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붉은색의 상징인 마법소녀 사루비아를 좋아했지만, 사루비아의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마법소녀 사루비아와 여름이면 탐스러운 붉은색으로 피는 꽃을 연결하지 못했던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툭하면 화자가 마시는 술로 언급되는 샐비어 주가 대체 무엇으로 만든 술인지 궁금했다. 샐비어. 검색창에 뜬 결과는 이 꽃을 일본에서 사루비아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그 사루비아가 이 샐비어였다니. 사루비아라는 이름은 마법소녀에만 주기로 하고, 여름 화단에서 만날 수 있는 이 붉은 꽃을 볼 때마다 샐비어라는 이름을 잊지 않기로 했다. 샐비어. 샐비어. 이 꽃의 이름은 샐비어다.


다시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낯선 이름 도금양에 연필로 밑줄을 쳤다조르바가 말했다. "하느님, 내 낙원은 도금양과 깃발이 나부끼는 크레타섬으로 해주시고,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게 하소서." 사랑을 상징하는 흰 꽃이라는 각주에 힌트를 얻었다. 크레타에 가려면 아직임에도 아테네에서부터 흰 꽃만 보면 멈춰 섰다. 물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서 도금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모른 채 헤매기를 선택했다. 헤매는 것은 여행의 디폴트 값이니까. 걷다가 흰 꽃을 보면 사진을 찍었고 냄새를 맡았다. 체온에 무르지 않을 정도로 꽃잎을 만져보기도 했다. 그 꽃을 도금양이라고 부르고 사랑이라도 할 기세로. 그것이 진짜 도금양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부겐빌레아, 샐비어 그리고 도금양으로 둔갑한 꽃까지. 그리스의 꽃이 지닌 색을 익혔다. 지중해 연안이라는 장소와 여름이라는 시간이 교차해서 만들어진 색. 이것이 여름의 그리스를 기억할 색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 첫날에는 목적 없이 걷기를 좋아한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만 알면, 여행은 편해지기 마련이니까. 그 감각을 키우기 위해선 탈 것으로 다니기보다 걷는 게 좋다. 이번에도 끊임없이 걸었고, 있는 줄도 몰랐던 바르바키오스 시장에 닿았다.


좀처럼 흥미가 없는 데도 상인이 권하는 술을 물리지 못해 괜히 탐미하듯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맑고 투명한 술이었다. 이름을 물어보니, 마스티하라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했다. 사실, 술을 건네받은 이유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샐비어 주를 찾고 있어요. 상인은 난생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샐비어 주? 그런 술은 없다고 했다. 그리스에서는 마스티하, 우조 이런 걸 마신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가 조르바를 처음 만난 피레우스 항의 어느 바에서 마신 술도 다름 아닌 샐비어 주였다. 소설이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옮겨지고,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겨진 탓일까. 샐비어 주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장에서 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누가 봐도 관광지로 보이는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모나스티라키. 모나스티라키 광장에서 바라보는 아테네는 상상 속에 있는 아테네와 닮아 있었다. 광장 뒤편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유적지가 겹겹이 보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 나 있는 길에는 여행자의 이목을 끄는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들어서 있어 제법 활기찬 분위기였다. 뜨거운 해를 피해 잠시 모나스티라키 역이 만든 그림자에서 쉬기로 했다. 그곳에서 체리를 파는 수레를 발견했고, 누군가 체리를 한 봉지 사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워서였을까, 나 역시 단 것이 당겼다. 저도 한 봉지 주세요. 상인은 투박한 손길로 체리를 담아 내게 주었다. 그리고 체리 한 알을 집어 들어 닦는 시늉을 하며 지금 먹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마른 먼지가 앉은 체리를 씻어 먹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상인이 일러준 대로 먹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옷깃에 체리 한 알을 닦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진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과 로만 아고라를 지나 골목을 걸었다. 길의 폭이 좁으니 건물이 낮아도 그늘이 깊게 들어왔다. 니하오. 곤니찌와.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 말을 들어야 할까. 평소 같으면 지겹게 듣는 인사말에 심드렁한 채 눈길도 주지 않았을 텐데, 종일 걷기만 한 나는 쉬고 싶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호객행위에 넘어가는 척하며 테라스가 있는 한 식당에 자리 잡았다. 아까 나를 불러 세웠던 그를 불러 니하오와 곤니찌와, 둘 다 내가 쓰는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짚어주었다. 나는 이 대화의 다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인사말을 물을 것이다. 정답이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또박또박 끊어 발음하며 말해주었고, 안↗︎녕↗︎하↗︎↗︎↗︎하며 물결치는 의문문으로 되돌아왔다. 그 인사말은 한국어라는 것도 알려주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짧은 한국어 강의를 마치고 나는 메뉴를 펼쳤다. 수분이 흐른 뒤, 주문을 받기 위해 온 직원에게 메뉴의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프로디테 주세요. 이 얼마나 관광객이 좋아할 만한 이름인가! 오늘만큼은 호객행위에 제대로 걸려들어보자는 심정이었다.


논알코올 칵테일이었는데도 나는 취하기 시작했다. 일정 이상 높은 기온에 계속 노출되면 정신이 약간 몽롱해지기 마련이니까.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다가 칵테일을 가쁘게 흡수했으니, 오래간만에 찾아온 냉기에 적응해야 할지 더위에 적응해야 할지 몸은 곤욕스러웠을 테지. 이내 진정을 되찾은 몸은 아무 목적 없이 걸은 만큼 이유 없이 늘어지길 원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나를 달랬다. 목적 없이 시작한 걷기를 가벼운 아프로디테 한 잔으로 매듭 지은 오후였다.


나를 취하게 한 아프로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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