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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나의 이름은.

그리스에서는 식사 후, 종종 식후 주가 나온다. 전통 음식인 무사카로 점심을 먹었던 아테네의 식당에서도 소주잔 크기의 잔에 맑고 투명한 술이 담겨 나왔다. 바르바키오스 시장에서 마셨던 술이 생각났다. 목으로 넘긴 술 한 모금에 혹시라는 물음표는 확신이라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재차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라 방금 술을 가져다준 직원에게 술의 이름을 물었다. 역시 마스티하였다. 저기, 혹시 이 술 이름을 써 줄 수 있어요? 이렇게 된 김에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느낌표 세 개짜리의 확신!!!)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펜을 건네받아 노트에 'Mastiha'라고 적어주었다. 가만히 보니, 그의 필체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아직 펜이 그에게 넘어가 있는 터라 '그' 부탁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네, 말해보세요."

(노트의 가장 마지막 장을 펼치고) "여기에 이 글자를 써줄 수 있어요?"

"코 레오?"

"네, 코레오. 여기에 써주세요."

"좋아요!"


이 사람은 양호한 편이었다. 대게 내가 코레오(χωρέω)라는 헬라어를 그리스인들에게 써달라고 하면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헬라어는 고대 그리스어이기에 지금의 그리스인들은 사용하지 않는 언어이다. 그럼에도 헬라어 알파벳은 그리스어 알파벳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헬라어를 적어달라는 부탁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쨌든 나는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그리스에서 쓰려고 가져온 노트 앞 장에 내 영어 이름 미셸을 대문자로 써놓고 보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그 아래에 최은영이라는 한글 이름의 자음과 모음을 풀어서 쓰는 편인데 이번 여행에는 최근에 얻게 된 이름인 코레오를 적고 싶었다. 그러나, 이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쓴 코레오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며 대화를 오래 나누게 되는 그리스인들에게 부탁을 하며 하나 둘 수집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날 바라볼 것이라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은 그리스어에 없다며 써주기를 거부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네가 알고 싶어 하는 말은 코레오가 아닌 코레보(χορεύω)야. 코레보는 댄스의 그리스어거든! 말함과 동시에 춤을 추면서 다른 말로 정정해 주었다. 아니, 다 아는데(아니, 사실 모르겠고) 내가 적어가고 싶은 건 코레오야. 이건 고대 그리스어라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해. 그러니까 제발 써줘. 나는 그가 코레보를 쓰고 넘겨준 노트를 다시 그에게 내밀며 애원을 해야 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생판 처음 본 외국인이 내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를 써달라고 한다면, 왠지 수상해 보일 것 같다. 대체 저걸 써가서 어디에 쓰려는 거지? 써주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으리라.




어쨌거나 내 마음에 쏙 든 코레오가 이리도 찬 밥 신세를 면치 못하다니. 억울한 마음에 여기에라도 코레오를 변호하는 글을 써야겠다. 코레오는 나의 신명(信名, Christian name)이다. 지난해,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와 올봄에 견진을 받게 되어 신명을 정하게 되었다. 천주교와 달리 성공회는 신명을 스스로 정할 수 있고, 성인의 이름이 아니어도 성서에 의미 있는 히브리어나 헬라어 중 하나를 정하기도 한다는 신부님의 안내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머리가 복잡해 그냥 미카엘라로 정할까 싶었다. 영어 이름인 미셸이 미카엘에서 온 것이니 여성형 명사인 미카엘라는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보기였다. 그러나, 고민 없음은 곧 성의 없음을 뜻하는 것 같아 괜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대천사라는 그의 직함이 무겁게 다가왔다. 고작 견진 하나 받았다고 내가 대천사의 이름을 쓸 자격이 되냔 말이다. 그냥 천사도 아니고 대천사라니! (아, 물론 견진이 고작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후견인 클레시스 님이었다. 신명이 고민된다는 말에 클레시스 님은 물었다. 은영 님은 어떻게 살고 싶어요? 언제나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답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답을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저는 여태까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답했던 것 같아요. 자아를 찾기 위해 여행하는 기분으로 산다고. 정말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저밖에 없었나 봐요. 자아를 찾는 여행이란 건 저에게 고독을 의미했거든요. 그렇게 살다 보니 때때로 이기적이게 구는 나를 합리화하기도 했고요. 그런 저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기도 했거든요. 상처를 주는 일은 저에게도 상처를 내는 일인데도 말이죠.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미처 알지 못한 삶의 이면을 바라보며 같이 웃고 울고 떠들던 때가 그리워요. 그러니, 이제는 제 삶에 타인을 초대하며 살고 싶어요."


이 대답은 지금의 코레오를 있게 했다. 성서에 등장하는 코레오라는 헬라어는 '자리를 만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명임에도 명사가 아닌 동사의 코레오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목적어가 비어져 있다는 점이다.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목적어 자리에 타인을 두어야 하니까. 


나는 여태 오롯이 혼자였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있었지만 그래도 혼자였다. 혼자서 완벽해야 타인을 만날 수 있다는 거짓된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 곁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면 밀어냈다. 고독을 고립으로 잘못 오해한 결과였다. 나에게 부족한 면은 숨겼고, 끊임없이 채웠다. 그렇게 하면 온전한 단단함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로 가장 가득 찬 상태가 되었을 때,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과잉 상태에 놓인 나는 외부의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 쉽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내야만 했다.


나에게는 수많은 구멍이 있다. 나는 늘 그것을 채우느라 바빴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 것이다. 그 빈자리에 꼭 맞지 않더라도 다양한 모양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수 있을 때, 구멍은 구멍다워진다는 것을. 누구나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빈 의자 같은 '자리'로 '구멍'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는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를 비워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구멍을 바로 보기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을 하며 바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초대받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는 나를 초대한 입장이고, 나는 그 초대에 응한 입장이었다. 코레오 쓰기에 열중하는 그리스인들을 만나면, 나는 신이 나서 부연 설명을 했다. 


"코레오는 자리를 비우다는 뜻인데요, 그것은 은유적인 표현이고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초대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그리스의 초대로 지금 이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당신은 호스트이고 나는 게스트인 셈이죠.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코레오를 써달라고. 그리스인인 당신이 써줬을 때, 의미가 더 가치 있어진다고 믿어요."


보통 여행을 할 적에 외국인 내게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면 한국어 이름이 그들에게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어 이름인 미셸을 알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은영도 미셸도 해나도(놀랍게도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아닌, 코레오로 여행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름을 물으면 코레오라고 답해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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