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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To. Heraklion

여행자의 약속만큼 덧없는 것이 또 있을까요? 이제야 당신에게 편지를 쓰네요.


편지를 쓰려니 내가 당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어째서 이름은 알려주지 않은 채 호스텔의 주소가 적힌 카드만 내 손에 쥐어주었나요? 물론 당신은 반문하겠죠. 왜 묻지 않았냐고. 네, 인정합니다. 괜한 투정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편지를 써 달라는 당부를 오래 간직하고 지냈어요. 그 말이 왠지 편지를 쓰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건 사람을 오래 본 사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여행자를 만나왔을지 알 수 있었어요. 편지를 쓰는 날 알아 봐줘서 고마워요.


있잖아요, 편지만큼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 또 있을까요? 편지는 늘 나중을 기약하게 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 다시, 또. 이런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이 편지에는 많으니까요. 이 편지 역시 당신과 이라클리온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담겨있겠죠. 음… 그리움만 보내려니 어째 속상한 마음이 드네요. 그렇다면, 가벼움은 어떨까요? 한국에서 그리스로 보내는 편지이니 Air Mail로 부쳐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Air Mail. 이렇게 말하고 나면, 그리움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지 않나요? 마치 편지가 정말 날아갈 것만 같고요. 이 편지가 가볍게 날아가 당신에게 나의 그리움을 전해주는 상상을 해봅니다편지를 다 읽고 난 당신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든 아주 잠시만 남았으면 좋겠어요. 가볍게 말이죠. 나는 당신이 내 편지 때문에 무거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도 나의 이름을 모르겠군요. 호스텔을 예약할 때 쓴 은영 초이 말고요. 나는 미셸이에요. 한때 해나였던 적도 있어요. 지금은 코레오라는 새로운 이름도 있고요. 코레오는 알죠? 당신이 써줬던 그 헬라어예요. 내 부탁에 당신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것이 기억나네요.(웃음) 이라클리온에서 플로리스트로 살고 있는 나의 또 다른 친구는 이름이 많은 내게 마피아라는 별칭도 지어줬답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부르고 싶나요? 어떤 이름으로 날 불러도 좋아요. 날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죠. 어차피 그 모든 것이 나라서 괜찮아요.


우리의 편지는 한 번의 배송으로 끝이 날까요? 아니면, 왕래하는 이야기가 될까요?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여행에 당신이, 당신의 일상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요. 


엽서의 그림은 내가 그린 거예요. 사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거든요. 기억해요? 당신에게 내가 그린 올리브 가지를 보여줬던 거. 그때는 가져간 게 펜 밖에 없어서 종이에 쓱쓱 그린 것이 다였는데, 평소에는 그림을 그릴 때 못 쓰는 종이에 색을 칠하고 그것을 자르고 붙이면서 만들 듯이 그려요. 펜은 어쩐지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게 돼서 결과에 매몰되는 기분인데, 자르고 붙이는 건 표현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게 해 주거든요. 이 그림도 그렇게 해서 그린 것이고요. 이왕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린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고 싶었어요. 이것이 편지를 늦게 보낸 변명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번 이라클리온 여행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가 없어요. 나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편이라서요. 막연한 희망사항은 접어둘게요. 대신, 또 편지할게요. 이건 지킬 수 있는 약속이거든요. 아마 당신은 알았겠죠. 내가 편지를 한 번만 쓰고 말 사람이 아니란 것을. 다음에는 그리움과 가벼움 그리고 또 무엇을 함께 보낼지 고민하도록 할게요.


그럼, 건강히 잘 지내요.


크레타에 있는 당신에게.


은영,

미셸 혹은 해나 그리고 코레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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