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지 못한 날들로부터

버리지 못하는 기억 8. 흉터 위에 새긴 다짐

by 은영

#1. 왜 우리는 사과하지 못했을까?

회사 동기들과 간 엠티 마지막 날, 그 일이 일어났다. 내 맞은편에 있던 W가 프라이팬을 내 쪽으로 기울여 튀기던 만두를 옮겨 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내 오른팔은 기름을 뒤집어쓴 후였다. 황급히 물가로 뛰어가 나는 찬물로 열기를 씻어냈다. 내 주변을 맴돌며 어쩔 줄 몰라하는 W를 보며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W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W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팔의 상처는 옅어져 갔다. 그러나 가끔 그날 일을 떠올리면 이런 물음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왜 W는 내게 사과하지 않은 걸까? 왜 나는 그런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그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내가 착각했던 걸까?(이렇게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게 된다.) 왜 그날 일은 그 누구의 잘못으로도 남지 않고 지워져 버렸을까?


#2.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를 받으셔야 합니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사과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조치 즉, 처벌이나 징계를 피해 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아마 가해자 측에 이런 말을 해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면 된다고. 그러니 어떻게든 꼭 사과를 받으세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과라 하더라도요. 사과를 받는 순간부터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겁니다.”

사내 언어 성희롱 사건으로 상담을 요청한 내게 변호사가 남긴 말이었다. 3년 전, 나는 이 사건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직장 상사가 부적절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내뱉는 그 모든 말들은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고민 끝에 주변 동료에게 알렸고 인사팀에 손을 뻗었다. 평소 사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담당하는 인사팀 직원이 내게 어떤 조치를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물리적 분리와 사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원한다고 말한 그 조치는 인사팀이 교육에서 지도한 내용이기도 했다.

“팀 내 다른 조직으로 인사이동 외에는 다른 조치가 불가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사과는 받고 싶다고 하셨으니 팀장님 동석 하에 사과를 받으시는 건 어떠세요? 다음 주 팀장님 출장 일정이 있으시던데 그때를 피해서 맞추시는 게 좋겠어요.”

얼마 후 돌아온 대답은 나를 분노케 했다. 여전히 그가 팀원으로 남는다는 것은 업무로 다시 마주할 수 있고 내가 일하는 사무 공간에도 그는 언제든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기죽어 있어? 어깨 펴!”라고 말하는 그의 동료들과 어울리며 아무렇지 않게 내 주변에 자리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 말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사과를 원하면 그건 해줄 수 있다니. 심지어 팀장님의 일정에 맞춰서 사과를 받으라니? 내 일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가?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인사 담당자에게 되물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제가 사과를 어떻게 받나요?"

평소 안내한 내용과 다른 인사팀의 조치에 크게 실망한 나는 결국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내가 변호사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사팀 담당자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내게 이 사건에 대해 말하고 다니면 가해자가 명예 훼손죄로 고소를 할 수 있으니 비밀로 하시라 협박하던 그들은 그제야 절차를 제대로 밟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상사는 기억에 없다던 잘못을 인정하고 내게 사과를 했다.


#3. 때 늦은 사과

반년 전, 헤어진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그때 내가 너무 어렸어. 내 상황에 몰려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볼 여유가 없었어. 그래서 네게도 상처를 줬어. 넌 나랑 대화로 잘못된 일은 풀어내고 싶어 했는데… 네 말을 듣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내가 부끄러워. 미안해.”

그러나 그의 사과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누군가와 실수로 부딪히는 일부터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사건까지… 이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은 누군가의 잘못과 그로 인한 상처가 늘 따른다. 이 중 그 어느 것도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멋쩍어서, 처벌이 두려워서, 기싸움에 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사과를 피하고 미루는 일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나의 상처는 사과받지 못한 날들로 인해 흉이 지고 말았다. 먼저 W와는 허물 수 없는 벽이 세워졌다. 사내 성희롱 사건은 사과받기까지 가해자와 주변인들로부터 2차 가해를 감내해야 했다. 또, 헤어진 애인의 때 늦은 사과는 애써 덮어두었던 내 슬픔을 다시 들추었다.

상처의 흉이 지기 전에 순간의 민망함을 무릅쓰고 상대방에 대한 속죄와 존중으로 사과를 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실수와 잘못을 피해 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의 마음이 아물 수 있을 때까지 부지런히 사과를 해야겠다고 이 글을 쓰며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의 이 구절을 흉터 위에 새겨본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21_24 apple.png 사과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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