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기억 9. 있는 그대로를 알아준 마음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3년 만에 라이자를 만나는 날이었다. 나의 미국 여행 소식에 라이자는 이따금씩 염려 섞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멀리 한국에서 오는데 이왕이면 하고 싶은 것으로 시간을 채웠으면 좋겠다고, 나중에라도 부담이 된다면 자기와의 일정은 재고해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짧게나마 보스턴에 들려 그녀를 만나는 것이 내게는 모마 미술관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스페인의 어느 작은 시골길에서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15일째 되던 날, 처음으로 라이자와 단 둘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요 며칠 종종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는데도 인사 외에는 딱히 오가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라이자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질문에 대답만 하다가 이번엔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고민 끝에 그녀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빌미로 영어를 잘하고 싶다며 정적을 깼다.
“Smiling and Trying!”
라이자는 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웃으며 항상 노력하라고 말이다. 성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반기듯 대화를 이어갔다.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해보라고, 그때마다 끝까지 들어주겠다며 대뜸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그녀는 나의 느린 영어를 답답해하지도, 중간에 말을 끊고 문장을 완성하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엉뚱한 단어로 엉성하게 짜여 있든 말든 일단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아껴두었던 자기의 생각을 꺼내곤 했다.
“근데… 네 본명이 미쉘은 아니지 않아? 한국 이름이 뭐야?”
순례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미쉘’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내게 라이자가 물었다.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나는 편의상 영어 이름을 써왔다. 특히 이름 석자 중 '은(Eun)'을 그 누구도 단번에 알아듣질 못했다.
“기억하기 어려울 텐데, 은영이야.”
“내가 말했지? 노력하면 된다고. 그나저나 다시 말해줄래? 운… 윤… 영?”
“Smiling and Trying.”은 라이자 본인부터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 뒤로 라이자는 내 이름을 윤영도, 운영도, 운용도, 아닌 '은영'이라고 불러주기 위해 애를 썼다. 미쉘이라고 불린 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그녀만이 유일하게 내 이름을 찾아주었다.
“은영.”
3년 만에 만난 라이자는 그동안 연습이라도 한 것인 양 내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거 알아? 이 이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외국인 친구는 너 밖에 없어.”
“어렵지 않은 일이야. 단지 너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고 싶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난 지금의 네 검은색 머리가 좋아.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이 색이 진짜 너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순례길에서 염색한 내 붉은 갈색의 머리를 보며 라이자는 원래 내가 지닌 머리 색을 궁금해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제일이라는 라이자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때처럼 지금도 회색빛이다. 그건 그녀가 지나 온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고유의 색이다.
“라이자, 네게 줄 것이 있어.”
나는 라이자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아침에 같은 숙소에 묵는 선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었다. 보스턴에서 만날 친구에게 줄 그림이라는 말과 함께. 선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따라 하기 어려운 탄성을 지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아하겠지?”
“그럼!”
선의 말대로 라이자는 이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펜을 꺼내서 오늘의 날짜와 내 이름을 함께 적어 주었다. 라이자는 내가 카미노에서 주었던 선물을 여전히 간직한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분주히 스마트폰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아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사무실 책상 한편에 내가 준 주홍빛 단감 모양의 참이 걸려 있었다. 그건 내가 순례를 떠나기 전, 길에서 만나게 될 친구를 위해 한국에서 미리 챙겨간 것이었다. 그녀는 이걸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한다고 했다.
“나도 챙겨 온 게 있어.”
보라색, 파란색 실과 별 모양의 펜던트였다. 라이자가 실 색깔을 골라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이미 캄보디아에서 한 빨간 실팔찌와 더 잘 어울리는 보라색 실을 골랐다. 그녀는 별 펜던트에 보라색 실을 꿰었다. 실 양끝을 잡고 둥글게 내 손목을 감싼 뒤 정성스레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우아한 손글씨가 담긴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 쪽지에는 이 별을 볼 때마다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Desire)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곧 소원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라이자, 스페인에서 내가 미국에 가면 네게 연락하겠다고 했던 약속 기억나?”
“그럼, 네가 오기를 기다렸지.”
별안간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내가 눈물이 많아서… 미안해.”
“아냐, 그건 타고난 네 감성(Gift)이야.”
라이자는 내게 명함을 하나 쥐어 주었고, 거기엔 그녀가 곧 이사 갈 집 주소도 적혀 있었다.
“이번엔 3년 만에 만났으니까 다음엔 그보다 더 빠른 시일 내에 보자. 그땐 우리 집으로 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오면 거친 수풀 너머 거위 농장이 보인다. 이 집에서는 그 어떤 신발보다도 장화가 편하다. 라이자의 아들을 따라 거위 밥을 준다. 서툴러도 해보려는 내게 라이자가 다가와 플리스의 지퍼를 목 끝까지 여며준다. 연중 흐린 날이 많은 라이자가 사는 동네의 일상적인 풍경에 내가 있다. 오후엔 소가 먹을 여물을 정리해야 한다. 창고에서 쟁기와 삽을 미리 꺼내 리어카 옆에 차곡차곡 쌓는다. 손뼉 치듯 부딪혀 먼지를 털어내고 목장갑을 벗어 그 위에 올려 둔다. 그녀가 내게 손짓한다. 여기서도 나를 '은영'이라고 부른다. 내가 좋아하는 퀴노아 샐러드를 준비했다는 말을 되뇌며 노란 조명이 어울리는 그녀의 부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자신의 집에 머물다 가라는 라이자의 말 한마디에 나는 잠시 그곳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