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 아까 물 먹었어요."
"들었어? 들었어?" "희재가 '아까'라는 단어를 썼어!"
"오! 나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네?"
물을 많이 먹이라고 한 의사의 말에 목이 정말 마르기 전까지는 잘 찾지 않는 아이에게 물병을 찾아 먹으라고 건네줬는데, 희재가 "싫어, 희재 아까 물 먹었어요."라고 정확하게 "아까"라는 단어를 문맥에 맞게 쓴 것이다! 만 36개월에 아들인 희재보다 훨씬 빨리 말을 잘하는 아이들(특히 형제자매가 있는 여자 아이들?)도 많겠지만, 하루하루 늘어가는 어휘력과 문장 구사력을 보고 있노라면 참 신기하다.
희재가 오늘로 거의 한 달째 아프다. 심하진 않지만 이주 동안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다가 삼 주 째에는 장염이 걸린 듯 설사를 하고, 거의 나아갈 삼 주 마지막 즈음, 나에게 다른 감기를 옮은 것 같다. 지금 걸린 감기는 이전의 이주 동안보다 훨씬 강력한지 아이의 몸에 힘이 없다. 나도 이주 동안 앓던 감기가 조금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번엔 아이 감기의 돌연변이가 내 몸속에 들어왔는지, 몸살 기운에 정시에 퇴근해 집에 와 이 글을 쓰고 있다. (근래에 야근 중...)
동갑인 아내와 나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서른한 살에 결혼을 하고(내 기준), 딱 일 년 반의 신혼생활을 보낸 후 아이를 가졌다. 둘 다 막연히 아이를 언젠간 갖겠지 생각했었지만 정말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결혼한 지 일 년 반쯤 지나 계획되어 있던 덴마크 친구 집 방문을 하고 즐거운 술파티를 벌이고 나서 돌아와 아이를 갖자고 했었는데, 웬걸 갑자기 터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기나 가져볼까 해서 피임을 안 했더니 거의 일주일 내에 홈런(?)을 쳐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렵게 된다는데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거사(?)는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는데, 이미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도 내가 아이를 갖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거랑 상관없이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곧이어 심장소리를 들려주었지만,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를 따라가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던 그 "감동"을 솔직히 말해서 잘 못 느꼈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애초부터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관심을 주지 않는 편이기에 나는 "아내 케어"에 전념했다. 아이도 아이지만 아내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데에는 항상 진심이었다.
"심장소리에 감동은 못 느꼈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함께하며 고통과 고생은 정성과 감동으로 바뀌어 갔고, 힘들지만 아이를 키워내고 있다." 라고 쓸 수 있었다면, 개인에게는 특별하지만 글의 주인공으로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출산 과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평소에 결코 따르지 않는 부모님 말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다."는 말이 이때만큼은 너무도 간절한 상황을 곧 맞닥뜨렸다.
임신 33주 차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우린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가진 여력이 부족해 대신 발코니가 넓은 2층 독채의 주인세대에 살기 시작한 지 3달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1층 음식점의 "세스코" 효과가 좋은지 바퀴벌레들이 2층의 우리 집으로 몸을 피신해 간혹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나왔었다. 새벽 3시쯔음 됐나 보다. 갑자기 아내의 "악" 하는 비명소리에 눈을 떴는데, 안방 벽에 평소보다 큰 엄지손가락 두 개만 한 바퀴벌레가 아내의 비명소리에 놀랐는지 숨죽이고 가만히 붙어있었다. 그리고 나선 아내의 진통이 시작돼 원래 다니던 동네의 산부인과에서 이제는 안 되겠다며 거의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진통 수준이라고 앰뷸런스를 불러 대학병원으로 보낼 때까지 나는 그 진통의 원인이 바퀴벌레인줄 알았다.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이 지나가는데 아내의 안색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간수치가 너무 높아져 얼굴색이 검게 보일 정도였다. 입맛이 없어 밥도 거의 못 먹으니 배불뚝이 임산부가 아니라 점점 배만 볼록(그것도 크지도 않게) 나온 기아 상태의 난민처럼 되어갔고, 내가 없으면 화장실도 혼자 못 갈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다. 입원 10일째에 더 이상 지켜보면 산모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의사는 제왕절개를 제안했다. 나는 뒤도 돌아볼 필요 없이 찬성했고, 거의 다음날 오후 1시 50분경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와 인사했다.
그리고 아내가 수술실에서 나오기까지 20분도 채 안 걸렸던 것 같다. 2시 10분경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희재의 고양이 인형보다 작은 1.7 kg의 희재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내는 기존에 있었던 병동으로 고이 잠든 채 나왔다. 아내가 전신마취로부터 깨어나면서도 겪은 많은 일들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정도로 담는 것으로 하겠다. 그때가 코로나 기간이기에 거의 한 달 동안 신생아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우리는 둘 중에 한 명만 하루에 30분 면회가 가능했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채우고 나서 2.3kg로 우리 품에 안긴 희재였다.
아이를 낳고 난 후의 삶은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어! 하는 사이에 벌써 만 3세가 되었다. 미숙아로 태어났고 몸도 좋지 않아 그간 병원도 참 많이 다녔다. 그사이 나는 커리어 같은 미래의 이야기는 이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육아휴직도 1년 썼다.
이렇게 고난의 과정을 겪고 난 지금은 우리 희재가 더없이 귀엽고 소중하다. 제 새끼 안 이뻐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고생한 만큼, 정성이 들어간 만큼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옛말이 더 와닿는다. 이제는 내 유튜브 알고리즘의 꽤 많은 부분이 육아, 훈육, 아이가 아플 때 대처하는 방법 등 아이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졌다. 이전의 삶이 나와 아내의 좋은 추억과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자연스레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은 노력이 주가 되었다.
돈이라면 그냥 아내와 나 둘이 저축할 정도는 안되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 외식하고 이렇게 살아갈 정도라면 됐다 생각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어디 괜찮은 투잡 없나 1년 이상 유튜브를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시도해기도 했다. 구글애드센스를 통해 블로그로 돈 버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거의 80만 원 가까운 돈을 내고 수강하기까지 했다. 구매대행을 위해 아내 명의로 사업자도 내보고, 유튜브를 하려고 25만 원짜리 마이크까지 샀었다. 회사 업무가 바빠지며 그중 하나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한 달 안에 모두 지리멸렬한 끝을 맺었지만, 아무튼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에 나도 놀라고 아내도 생경해하는 중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다가 아이의 건강상태가 좋아지며 최근에 여유가 생긴 건지 나와 아내는 둘째 갖는 고민을 하는 중이다. 희재를 갖고 키우며 깨달은 점은 "아이를 아예 안 갖겠다는 소신이 있으면 안 가지면 되지만, 고민되면 일단 저지르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또 그 과정을 다시 겪으려니 고민이다. 뉴스만 틀면 나오는 쉽지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짊어질 또 하나의 아이를 갖는다는게.... 그래도 현재 선택할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난자를 냉동하면 어떨까? 하는 말까지 하며 여지를 남겨놓는 우리다.
앞으로 희재는 또 얼마나 우리의 삶을 바꿔놓을까? 또 하나의 아이를 과연 갖게될까? 그저 희망찬 미래만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우리 세 가족이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꾸준히 내 선택을 할 것을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