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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토와 도가니탕

09. 시원하고 뜨거운

by 허니베리



첫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하는 날.


부모님께서 입원실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셨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엄마의 손등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병원 생활에 필요한 짐으로 가득 찬 가방은 우리 가족의 근심만큼 무거워 보였다.

밖에 선 나는 엄마의 손을 잡듯 빈 주먹을 살포시 쥐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히며 어색한 미소를 띠고 계시던 부모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엄마 눈가가 반짝였다. 그 장면에 눈이 시렸다.


병원 출구를 막 나왔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병실에서 주무시라고 하고 1층으로 내려왔어. 너 아직 병원에 있나 싶어서.”

“병원 근처예요. 얼른 돌아갈게요.”

엄마는 차를 돌리겠다는 나를 만류하지 않으셨다. 평상시 딸에게 이런 수고를 절대 끼치지 않는 분이신데.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데, 나를 먼저 발견한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식의 눈에는 부모가 희미한 배경 같아도, 부모의 눈에 자식은 그 배경에 핀 붉은 꽃이다.


나를 향해 힘없이 팔을 흔드시는 엄마 곁으로 달려갔다.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엄마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피하셨다.

엄마의 눈시울이 장마철 습기 머금은 벽지처럼 얼룩지고 부어 있었다.


우리는 마치 원두막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여유를 즐기는 소녀처럼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뙤약볕 아래 농부의 괭이질처럼 늘어지고, 퍽퍽했다.


“시원한 거 사줄까?” 물을 찾는 내게 엄마가 물으셨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에게 젤라토를 먹자고 했다. 엄마에게 맛 보여드리고 싶었다.

엄마는 밖에 데리고 나간 어린 딸이 덥다고 떼를 부려도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셨다. 그 무렵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든 딸에게 쌈짓돈을 꺼내 간식을 사주시면서, 미안하다 하셨다.

엄마와 젤라토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과거의 우리에게도 달콤함과 시원함을 나눠주었다.


엄마가 아버지의 병실로 올라가신 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길게 누웠다. 하지만 홀쭉해진 아이의 배를 보고,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밥을 짓고 찌개 재료를 손질하던 중 애호박, 버섯 같은 재료를 덜어내어 볶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밑반찬으로 가져다 드려야지.

갓 지어 윤기 흐르는 밥이 아이의 동그란 입에 쏙쏙 들어갔다. 부모님께서는 식사하고 계시려나.


엄마에게 전화하니, 아버지는 또 금식이라고 하셨다. 이게 벌써 몇 번째 금식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아버지를 생각하자, 내 속도 쓰려왔다. 항암 치료 시작하면 잘 드시지 못할 텐데.


식도락가에 미식가 아버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왕의 식탁 못지않았다. 봄이면 주꾸미, 초여름이면 송어, 여름이면 장어, 가을이면 전어, 겨울이면 굴. 신선한 제철 음식을 먹는 기쁨을 아버지가 아니면 어떻게 알았을까.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금 사시사철 미식 여행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퇴원 후 아버지께서 드실 수 있을 만한 음식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을 열고, 할 일 목록에 '도가니탕 포장'을 저장했다. 환자복을 벗은 아버지가 펄펄 끓인 도가니탕에 갓 지은 밥을 말아 후후 불며 드시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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