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방의 무게
아버지의 퇴원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서둘러 일을 마쳤다.
신호도 걸리지 않고 시원하게 도로를 달리던 차가 시청 앞에서 멈춰 섰다. 도로를 점거한 집회 행렬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조함에 몸이 창문 쪽으로 기울어지고, 운전대를 쥔 손가락에 힘이 주어졌다.
주차를 하고 로비로 올라가자, 부모님은 이미 퇴원 절차를 마치시고 의자에 앉아계셨다. 짐가방을 사이에 두고 정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방 곁의 두 분이 왜소해 보였다
의사가 내게 암 진단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버지를 진료실 밖으로 내보낼 때, 나를 돌아보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첫 항암치료를 거뜬히 버텨내신 아버지가 대견했다.
부모님 곁으로 다가갔다.
전화로 들려오던 목소리와는 달리 부모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아버지의 뺨은 며칠 새 수척해졌고, 엄마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제한된 감각으로 전해지는 정보는 사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몸을 일으키시자, 헐렁해진 티셔츠가 펄럭였다. 서리 낀 벌판을 지키는 허수아비를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저릿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네가 고생 많았지.”
시선을 가방으로 돌렸다. 이불까지 들어있는 커다란 가방은 두 분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표현한 작품 같았다.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 이 정도는.”
아버지의 팔이 나보다 더 가늘어 보였다.
우리 아들이 두 돌 무렵, 아이가 혼자 있던 방문이 덜컥 잠기자, 아버지께서는 순식간에 달려가셔서 손잡이를 뜯어내셨다. 땀에 흠뻑 젖은 채 한 손에는 손자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손잡이를 들고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굵은 팔뚝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 없어서 아버지께 손가방 한 개를 건네드렸다. 가방을 건네받으시고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셨다.
'힘이 여전하시네요!' 아버지를 소리 내 칭찬해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집에 가는 길에 사무실에 들르자고 부탁하셨다. 항암 후 면역력이 떨어진다는데, 충분히 휴식을 취하셔야 한다는데.....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계속 일하기를 원하셨다. 일로써도 당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으신 거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과 줄다리기를 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병에게 힘을, 그 힘으로 떠받쳐지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께서 잠시 업무를 보시는 동안 건물 밖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일이야 본인이 힘들면 그만두실 테고, 그러면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가려고."
“그럼...."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럼, 엄마가 혼자 치료 과정을 감당해야 할 텐데, 이제 시작인데, 엄마도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어쩌실 건데요?”
내 목소리에 엄마 얼굴이 붉게 변하더니 고개를 푹 떨구셨다. 연세 드실수록 마음 벽이 얇아지는 엄마에게 이토록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아야지, 늘 다짐하건만.
엄마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으셨다.
"네게 너무 부담을 주고 있잖니, 우리가...."
엄마와 나는 서로 눈치를 살피며 부모님 댁으로 이동했다. 남편도 아버지를 뵙기 위해 친정으로 왔다.
아버지의 젓가락은 사위가 정성껏 구워드린 고기를 집느라 쉴 틈 없었다. 병원에서는 냄새난다고 식사를 못 하셨다던 분이 맞나 싶었다.
집으로 들어와서 등을 다 밝혔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어두움이 가시지 않았다. 엄마의 그늘진 얼굴이 어른거려서일까.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에게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주무세요?’
‘아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 못한 채, 다음 날 새벽 배송받으시도록 주문한 식료품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대답하시는 엄마의 목소리에 졸음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 죄송해요. 아까 버럭 해서."
"내가 미안하지, 너한테 짐이 되어서."
“다신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엄마가 짐은 무슨 짐이야!"
그리고 흐른 정적.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엄마, 앞날 걱정은 마세요. 내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나랑 사위가 얼마나 착해. 우리가 두 분 잘 돌봐드릴게요.”
"너희에게...... 항상 고맙고, 늘 미안하구나."
엄마의 말씀에 하고 싶던 말을 꿀꺽 삼켰다.
‘이젠 내가 두 분 보호자잖아요.’
전화를 끊자, 활기차게 부엌을 오가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손끝에서 나오던 기름진 매콤한 냄새 속에 한없이 머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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