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다. 오늘 그가 내게 보여준 행동을 하나하나 복기해 보고, 그가 보낸 짧은 문자도 수십 번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굿.밤. 굿밤 이래. 으흐흐흐흐흐흐.....’
다음 날, 출근하여 회의를 마친 후 새로운 설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의 안건을 제시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
A: 우린 괜찮아. 다 이해할 수 있어.
나: 네? 뭐가...?
A: 일단 애를 먼저 만들어요. 괜히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B: 에이, 그건 좀 이르지. 일단 상대방 마음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나: 그러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C; 영화 보자고 해봐요. 마침 내일이 휴일이니.
이튿날 오전.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 되면 영화 보지 않을래?’
거절당하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얼굴을 드나. 모임 사람들에게 단체 문자로 보낼까? 상한에게만 보내는 것보다는 안전하잖아? 아니다. 용기 내어 저질러보자. 문자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초 만에 답변이 왔다.
‘OK’
이 남자는 이토록 짧은 단어로 내 마음을 쿵 하고 울리는 재주가 있다.
우린 그렇게 단둘이 영화를 봤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송에서 요란하게 비 소식을 예보한 덕에 둘 다 우산이 있었다. 그가 먼저 우산을 폈다. 나도 우산을 펴려고 하자 그가 차갑게 면박을 줬다.
“이렇게 붐비는 거리에서 둘이 나란히 우산을 펴고 걸으면 사람들 통행에 방해되잖아. 요즘 누가 촌스럽게 우산을 각자 쓰나?”
‘이게 요새 예의이자 트렌드인가?’ 선생님께 꾸중 들은 아이처럼 민망하여 얼른 우산을 접고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어리숙했던 나의 모습에, 내 이마에 스치는 그의 숨결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와 고깃집에 들어갔다. 그는 고기를 구우며 자신의 인생에 관해, 마치 남몰래 수십 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히 프레젠테이션 하듯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미국에서의 생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 복무 하러 한국으로 온 일, 제대 후 부모님 계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공과 무관한 현재 직업을 갖기까지 힘겹게 보낸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과 비전.
이상한, 정체가 뭐지?
모임 사람들이 주식 이야기 나누거나, 영어와 관련하여 젠체할 때도 전혀 나서지 않던 사람이다. 상한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리고 이 친구, 내가 먼저 만나자고는 했으나 그렇다고 너무 훅 들어오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상한은 나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버스에 올라탔다. 정류장에 서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매에 웃음이 서려있었다. 그의 눈이 밤하늘 초승달보다 아름다웠다. 이러한 미소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에 관해 밝힌 사실이 다 거짓이라 해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음악회에 간 날부터 이미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구상에서 나와 비슷한 생명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불나방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타오르는 연애 감정의 불꽃을 향해 과감히 뛰어드는 불나방이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도 어느 정도 확인됐겠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한국에서 여행 가본 곳이 거의 없다고 했지? 내가 가까운 곳부터 구경시켜 줄게.”
말은 던졌지만, 정작 나야말로 서울 근교에 놀러 갈만한 아는 곳이 없었다. 기껏 머리를 쥐어짜 떠오른 장소가 미사리. 차가 있는 내가 뚜벅이인 그의 회사 앞으로 찾아간다고 하자, 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오지 마. 내가 학교 앞으로 찾아갈게.”
역시, 이 남자 나한테 정말 마음이 있는 게 백 퍼센트 확실하다. 그렇게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훗날 상한 씨에게 직접 들은 그의 입장(역순)
- L이 회사 앞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여자 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괜히 회사 위치를 알려줬다. 귀찮지만 차라리 내가 학교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 (고깃집에서) 나는 새로이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 삶의 계획에 관해 들려준다. 그러면 상대방도 마을을 열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나눈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과 지내는 방법이다.
- (영화 보자는 문자 받고) 휴일인데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를 살펴보았다. 자고 있을 C나 K를 깨워 영화나 보자고 할까? 때마침 L이 영화 보자는 문자를 보냈다. O.K. 어차피 내 친구 놈들은 다 술에 취해 뻗어 있을 테니까.
- (치킨집에서 나와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치킨집 뒤편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L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쩜 저리 궁상맞아 보이는지.... 우산을 씌워주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L이 난데없이 반말한다. 아, 화가 솟구쳤다. 성인 되어 만났는데 고작 몇 살 많다고 반말이라니. 버스를 태워 보냈더니만 집에 가는 내내 썼는지, 편지처럼 긴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난 원래 MMS는 절대 안 읽는다. 광고 내지는 쓸데없는 이야기일 게 뻔하니까. 답하기도 귀찮아서 ‘굿밤’ 하고 말았다.
- (음악회) 오래간만에 사우나하며 묵은 때를 벗기고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더워서 양복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졸다가 떨어뜨릴 것 같다. 옆자리에 앉은 L에게 맡기고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 (청년부 모임) 큰마음먹고 앉아있긴 하는데, 늘 일요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숙취와 술 냄새로 인해 입을 열 수가 없다. 그나저나 노처녀 소개팅 이야기만큼은 진심으로 짜증 나서 뭐라 대꾸를 안 할 수 없다. 그 거지 같은 이야기를 왜 자꾸만 꺼내는 것인지. 아, 정말이지 한심하다. 어떤 놈팡이가 데려갈지, 그놈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일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