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결혼은 단연 으뜸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었지만, 변변한 연애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꿈이었다. 당시 내 눈앞에 하나님이 나타나 “네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하고, “네가 갖고 싶은 게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가정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답하고, “네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을 정도로 무엇보다도 간절히 결혼을 꿈꿨다.
금요일과 토요일 밤이면 이러한 절박한 심정을 손끝에 담아 공들여 화장하고 소개팅을 했다. 일요일에 교회 청년부 모임 장소에 나가면, 청년들은 인기 주말 드라마 시청을 위해 TV 앞에 모여든 가족들처럼 삼삼오오 내 곁에 둘러앉아 소개팅 후기를 들려달라며 재촉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으레 나와 새로운 소개팅남이 좋은 만남 이어가길 기원하며 응원해 주었다. 딱 한 사람, ‘이상한’ 군만 빼고.
이상한은 내가 만난 남자들에 관해 매번 부정적 견해를 내놓았다. 원색적인 어휘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지, 이 일이 반복되며 나는 ‘어, 이 친구가 나한테 관심 있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군은 내게 ‘경계 대상 1호’였다. 매번 구멍 난 같은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서는, 이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남들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내 이야기에 버럭 짜증 내고는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청년.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차에 시동을 걸자, 차 문을 벌컥 열고 올라타더니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달라고 하는 뻔뻔한 구석까지 있었다. 아, 내리면서는 차에 있던 내 커피를 들고 가기도 했지. 소개팅남과 잘해 보려다가도, 이렇게 이상한 ‘이상한’ 군의 부정적 평가가 떠올라 왠지 찝찝한 마음에 결국 만남을 포기하는 일도 생기곤 했다. 이상한 군,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지?
그러던 어느 봄날, 청년부 사람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다들 들뜬 표정으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타났다.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인 내가 외쳤다.
“다 왔으니 들어갈까?”
그러자, 누군가가 “아직 상한이가 오지 않았는데요.”라고 답했다.
“아, 그런가?”
‘이상한’은 내게 어지간히 존재감도 없었(다기보다 무시하고 싶었)나 보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저기 상한이가 오고 있네요!”
하지만 그가 가리키는 곳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상한’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새하얀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매끈하게 차려입은 근사한 남자가 갈색 구두를 신고 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까지 나는 저 남자가 정말 ‘이상한’이라고? 뭐지? 그동안 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한의 모습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심호흡했다.
어쩌다 보니 그와 나란히 앉아 공연을 봤다. 짧은 치마로 인해 드러난 허벅지가 새삼 부끄러웠다. 드러난 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이상한 군이 내 다리 위로 슈트 재킷을 툭 던져주었다.
“들고 있기 귀찮으니 좀 들어줄래요? 난 피곤해서 잠시 눈 좀 붙이려고요.”
재킷으로 다리를 감싸자, 그의 온기와 옷감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세상 까칠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대체 뭐지?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과 간단히 치킨 두어 조각 씩 나눠먹은 뒤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하늘에서 후드득 비가 떨어졌다. 다들 당황해서 서둘러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하지만 길치인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해 두리번대고 있었다. 밤도 깊고 어두운데다가 여의도 지리도 전혀 모르는 나는 외국에서 길을 잃은 것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다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이상한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났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나, 여기 잘 알아요. 집이 OO동이라고 했지요? 차 타는 데까지 데려다 줄게요.”
그가 받쳐주는 우산 아래에서 그와 팔이 맞닿는 것을 피해 팔짱 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는 두둑두둑 빗소리와 찰팍찰팍 우리 둘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목소리에 최대한 위엄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상한아, 고맙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내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정색하며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어, 나 사람들이 나한테 반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나보다 아무리 나이 많아도.”
엄청 재수 없는데 겁나 근사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중 우산 밖으로 삐져나와 비에 흠뻑 젖은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작고 날카로운 화살촉이 날아와 심장에 콕 박힌 것처럼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버스를 타고 창밖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살며시 흔들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덕분에 무사히 집에 가게 되었다. 은혜를 갚고 싶다.’ 등등의 내용을 꾹꾹 눌러 문자를 보냈다. 한참 뒤 그에게 답이 왔다.
‘굿밤’
내가 보낸 200자 정도의 메시지에 딱 두 음절 답이라니. 예의를 씹어 먹은 것 같은 답인데,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