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쉬운 연애가 있겠느냐만, 그와의 연애는 시작부터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사회에 갓 발걸음을 내디딘 그는 누군가와 연애할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다. 그와의 만남은 밀가루 반죽을 길게 잡아 늘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우리가 만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결혼 준비가 되지 않은 그는 결국 결혼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별을 통보했다. 그와는 반대의 이유로, 시간이 흐를수록 결혼 생각이 절실해지던 나 역시 헤어질 결심을 했던 터였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함을 확인한 후 미국인보다 쿨하게 악수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집에 가서 열어보라며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느낌이 왔다. 그냥 집에 들고 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만류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포장지로 싸여있던 박스 안에는 팔찌와 귀걸이 세트 그리고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지에는 그동안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글이 반성문 깜지처럼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군데군데 눈물로 번진 듯한 흔적도 보이는 듯했다. 연애하는 기간 내내 분식집에서 라면 먹고, 국수 먹고 다녔어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람. 그의 형편과 검소한 생활을 잘 알기에, 이러한 가격대의 액세서리를 구입한 그의 행동에 놀랐다. 그것도 이별하는 판국에 말이다. 사실, 그와 연애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그가 지닌 나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헤어짐을 준비하며 구입한 선물은 그의 애틋한 사랑과 인격을 보여주는 실체로 다가왔다. (그렇다, 나는 이토록 물질에 약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놓칠 수 없다!’
차에서 내리려는 그를 붙잡았다. 그가 차에서 내리면 바로 한강으로 갈 거라고 외쳤다. 순진했던 그는 내게 넘어왔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진짜 순진했던 것은 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와 다시 연애를 이어갔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는 여전히 바빠서 밤 열 시에 연락 한 번, 주말에 잠시 보는 것 외에는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점차 지쳐갔고, 투덜거렸다. 마침 우리와 잘 알고 지내는 커플이 비슷한 일로 다퉜는데,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명품백을 사주며 달래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니, 명품백이라니! 그런 걸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도, 덥석 받고 자랑하는 것도 정말 이상해. 안 그래?”
남의 일에 공연히 펄쩍 뛰며 험담했다. 남녀 관계에서 이런 것을 주고받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그는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핸드폰 검색만 했다. 한참 후 그가 핸드폰에서 손가락을 떼더니 말했다.
“이사 선물 보냈어.”
무슨 선물인지 물어도 그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이사한 집으로 커다란 냉장고와 세탁기가 배달되었다. 나는 이런 ‘큰’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쉽게 반품할 수도 없는 선물이었다. 그 뒤로 기념일만 되면 선물들이 배달되었다. 전기밥솥, 수저 세트, 컵 세트... 마냥 좋아하기에는 좀 애매한 선물들이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소주잔 세트가 도착하고 나서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때 받은 선물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그와 함께. 내가 결혼 전 받은 선물 아닌 선물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당당히 말한다. 당시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한 게 맞다고. 소주잔만 빼고.
이처럼 '이상한' 씨는 물질을 사랑하는 나를 다룰 줄 아는 참으로 현명하고 실용적인 사람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총각 시절 그는 열 시에 나와 통화를 마친 뒤 친구들과 새벽까지 놀곤 했다고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