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와 ㄲㅂ

이름 논쟁

by 허니베리


 남편에게 전화를 걸면 그의 핸드폰 액정에는 내 이름 석 자가 뜬다. 내 이름에 딱히 불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애칭은 고사하고 애정 담긴 수식어나 이모티콘 하나 없이 단지 이름 석 자만으로 그의 연락처 목록에 존재한다는 게 서운했다. 처음 그 사실을 발견하고 수정을 요구하자, 그는 ‘○○○을 ○○○이라고 저장하지, 대체 뭘 원하냐?’며 싸늘하게 물었다. 나는 그의 차가운 반응에 굴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표현을 꿋꿋이 나열했지만, 그는 ‘귀찮고, 소모적이다’라며 거절했다.




내가 미혼 시절 사용하던 영어 이름은 '소피아'다. 지금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쑥스럽기도 하고, 너무 흔한 이름인 것 같기도 하여 남편에게 나에게 어울리는 영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물론 들은 척도 안 했으나, 이번에는 억지 생떼를 부리며 그를 종용했다.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한번 노력해 봐요.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흔한 이름보다, 나를 잘 아는 남편이 지어주는 이름이 의미 있을 것 같으니."


실은, 남편이 내게 어떠한 이름을 붙여주는지를 보며 나에 대한 그의 심상을 알고 싶었다. 잠시 뒤, 도통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이 벌어지며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마피아!

“뭐라고? 나보고 지금 '마피아'를 이름으로 쓰라는 거야?”


“놉! 마피아는 Mafia, 당신은 Marphia. 한국어와 영어의 조합으로 독특하고 창의적인 이름이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했으나, ‘R’을 강조하는 그의 발음을 듣고 보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와 영어의 조합도 신선하고.


“Marphia, 뜻은 뭔데?”


“소피아의 '소'가 너무 흔하다고 불평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로 하자고. 외국인들 발음하기 쉽게 L 대신 R을 넣었고. 그래서 Marphia.


아... 이 사람에게 뭔가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나는 남편에게 서운하다고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 전화기 속 남편의 호칭 역시 #이상한 이다. 그의 전화기 속 내 이름과 차이가 있다면 이름 앞에 #이 붙어있다는 건데, 그 이유는 내 핸드폰 속 명함 앱과 전화번호부가 연동되어 그의 연락처가 자동으로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부장'이라고 저장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여기까지는 남편과 비등비등했다면, 사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외국에 사는 후배와 오랜만에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언니, ㄲㅂ님은 잘 계셔?"

ㄲㅂ?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무슨 암호인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ㄲㅂ이 누군데?"

"어머머, 언니 진짜 너무한다. 형부잖아, 형부! 연애 시절 그토록 불러대더니 기억이 안 나?"

ㄲㅂ, ㄲㅂ이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후배에게 되물었다.

"내가 상한 씨를 꼬붕이라고 불렀던가?"

후배가 이모티콘으로 ㅋ만 서너 줄 입력하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언니! 꿀벌 님, 꿀벌 님 하면서 그렇게 쫓아다녀 놓고서는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어?"

, 후배의 말에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의 모습이 꿀벌과 닮기도 했고, 그의 곁에 있으면 달콤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그를 꿀벌이라고 불렀었지. 그 기억을 까맣게 지워버리고서는 남편과 연관 지어 떠오르는 단어가 고작 ‘꼬붕’이라니, 세월이 야속하구나.





 앞으로도 우리의 핸드폰에는 서로의 이름만 담백하게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세월이 흘러도 질리지 않고, 민망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더이상 서로의 이름을 저장하거나 부르는 데 특별한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의 이름 속는 내 삶이, 나의 이름 속에는 그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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